美 무차별 관세 폭격에 한 발 물러난 EU
러·우 전쟁 종전 협상에 패싱당한 유럽
방위비 증액 압박 거세져 나토동맥 약화 우려
"지난주는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붕괴된 이후 유럽에서 가장 암울한(bleakest) 한 주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20일(현지시간) 유럽이 처한 현재 상황에 대해 이같이 진단하며 "유럽의 구질서는 무법 시대에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에 대한 벼락치기 과외가 필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신세계의 무질서에 (구질서가) 희생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美 관세 폭탄 예고하자… 유럽, 자동차 등 주요 품목 관세 인하·폐지로 美 달래기
유럽이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인상 압박에 따른 경제난 우려, 미·러 밀월관계 속 유럽 안보 위협 심화까지 백악관 주인이 바뀌면서 유럽의 위기가 증폭되고 있는 모양새다. 미국을 견제하고 유럽의 위상을 굳건히 하려면 관세, 안보 등에 공동으로 맞설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지난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긴급회의는 유럽 국가가 단합보다 분열에 더 가까운 상태임을 보여줬다.
현재 유럽이 겪고 있는 위기는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상호관세를 예고하면서 유럽을 콕 집어 유럽연합(EU)의 자동차 관세가 미국(2.5%)의 네 배인 10%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유럽의 상대적으로 높은 부가가치세(VAT)도 지적했다. 다음 달부터 미국에 수입되는 모든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25% 관세 적용도 예고한 상태다.
관세 충돌이 우려되자 EU는 19일 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품목의 관세 인하와 폐지 의사를 밝혔다. 트럼프 집권 1기 때 미국이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 관세를 매기자 미국산 위스키, 청바지 등에 보복관세로 대응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다. 이는 유럽의 경제·정치적 위상이 트럼프 이전 집권 시기보다 약화했음을 방증한다. 게다가 러·우 전쟁 탓에 에너지 비용이 상승한 여파로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관세 폭격이 더해지면 경제가 더 뒷걸음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행보로 풀이된다.
미·유럽 동맹관계 후퇴… 친러 행보 노골화하는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대외정책도 유럽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러시아를 봉쇄하고 고립시키는 장기 전력을 취해온 미국이 트럼프 체제에선 기존 정책을 폐기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밀착하는 모습을 보여서다. 미국과 러시아가 유럽을 빼놓고 우크라이나전 종전 협상을 벌이면서 유럽 안보의 핵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이 배제됐다는 불만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친러 행보를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친러 기조에 대해 일각에선 미국이 러시아·유럽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는 시도란 해석도 나온다. 이는 미국이 주요 7개국(G7)의 우크라이나 전쟁 3주년 성명에 ‘러시아의 침공(Russian aggression)’이라는 표현을 넣는 데 반대하고 러시아를 규탄하는 유엔(UN) 결의안 초안에 이름을 올리기를 거부한 사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오랜 동맹관계는 균열이 생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내 병력을 줄이고 나토에 대한 기여를 축소하겠다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8일 유럽이 미국과의 오랜 밀착 관계를 보류하고 홀로서기를 고민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에 따라 유럽이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있다고 전했다.
안보 위기 사태를 봉합하기 위해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국가 정상들이 지난 17일 파리에서 급히 회의를 열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분열만 초래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유럽 지도자들은 2월17일 파리에서 급히 회동했지만 그들의 차이점을 알리는 데만 성공했다"며 "러시아의 침공 이후 3년이 지났지만 유럽은 군사 지출을 충분히 늘리지 못했고 유럽은 다자간 조약과 공유 가치에 대한 구식 세계관에 갇혀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이 촉발한 방위비 증액 논란은 유럽 내 동맹론과 자강론 논의를 심화시켜 유럽 국가 간 결속을 약화시키고 있다. 미국 정부는 20일 미국 주도의 외교·안보 동맹체인 나토 회원국 가운데 국내총생산(GDP)의 2%를 방위비로 지출하지 않는 회원국에 대해 오는 6월 나토 정상회의 전까지 이를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미국이 방위비 증액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 유럽에선 기존의 나토 중심의 동맹체제를 강화하는 동맹론과 EU 중심의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추구하는 자강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태다.
미국의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빅토리아 코츠 국가안보 외교정책 부회장은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며 "더는 전후 시대가 아니고, 지정학적 지형이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 질서를 해체할 만큼 일관성 있는 이념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며 "한 개인의 견해일 뿐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사람이 대통령"이라고 지적했다.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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