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스트 리포트
바나듐이온배터리(VIB) 세계 최초 개발
스탠다드에너지 개발 현장
지난달 16일 대전 유성에 있는 스탠다드에너지 본사. 대표이사 사무실에 들어가니 한쪽에 놓인 커다란 직육면체 모양의 검은색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거실용 TV 장식장을 연상시키는 박스 위에는 이 회사가 제작한 일반적인 형태의 에너지저장장치(ESS) 모형이 놓여 있었다.
"아래에 있는 검은색 박스도 사실 ESS"라는 이 회사 김부기 대표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뻔했다. 김 대표는 "일부러 TV 장식장처럼 만들어봤다"며 "ESS도 이제 가전처럼 집 안으로 들어오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전기 자동차를 중심으로 이차전지가 많이 보급됐지만 여전히 화재를 불안해하는 소비자들이 많다. 배터리를 사용하는 ESS도 잊을 만하면 화재 사고가 발생한다. 그런데 ESS를 각종 건물과 가정 내에 두겠다는 회사가 있다. 바나듐이온배터리(VIB)를 개발하는 스탠다드에너지다. VIB를 ESS를 타일 모양으로 만든 ‘에너지 타일’은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IT 전시회 ‘CES 2025’에서 혁신상을 받기도 했다.
김 대표는 이날 기자와 만나 "VIB에 대한 수요가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3월까지 양산 라인을 구축하고 램프업(생산량 증가)을 거쳐 오는 6월부터 본격적으로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하기 쉬운 소재’ 바나듐
VIB는 물을 전해질로 사용하기 때문에 화재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양극과 음극에는 종류가 다른 바나듐 화합물을 적용한다. 충·방전을 하게 되면 바나듐 이온과 물이 화학 반응을 한다. 이때 양이온이 분리막을 통해 이동하면서 충전과 방전을 하는 원리다.
VIB의 원형은 바나듐레독스흐름전지(VRFB)다. 하지만 VIB는 구조적으로 VRFB와 완전히 다르다. VRFB는 바나듐 전해액을 별도의 저장 탱크에 저장한 뒤 펌프를 이용해 순환시킨다. 반면 VIB는 미세유동(Microfluidics) 기술을 이용하기 때문에 펌프가 필요 없다. VRFB는 탱크와 펌프가 필요해 대형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VIB는 소형화할 수 있다.
김 대표는 스탠다드에너지를 창업한 초기에는 VRFB를 개발했으나 4년 만에 접었다. "VRFB는 펌프를 가동하기 위한 별도의 전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에너지효율의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VIB 개발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김 대표는 카이스트(KAIST) 연구 조교수로 재직하던 2013년 28세의 나이에 스탠다드에너지를 창업했다. 부임 6개월 만이었다.
"좋은 기술이 논문 발표로만 끝나는 사례를 많이 봤어요. 많은 사람이 제가 만든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김 대표가 바나듐에 주목한 것은 ‘구하기 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하지만 바나듐은 철강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광물이다. 강철에 소량만 첨가해도 강도를 높여주기 때문에 다양한 산업 분야에 활용된다. 바나듐은 콜레스테롤 생산을 조절하는 효과도 있어 영양제로도 복용한다.
김 대표는 "좋은 기술은 많은 사람이 쓸 수 있어야 하고 그만큼 구하기 쉬워야 한다"며 "같은 이유로 저희는 희토류도 쓰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바나듐이온 배터리에 쓰이는 소재들은 그동안 배터리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으나 모두 구하기 쉬운 것들이라고 한다. 중국이 광물을 무기화하는 경우에도 자유로울 수 있다.
부피 크지만 고출력 장점, ESS에 최적
VRFB는 약 30년의 역사를 가진 기술이지만 VIB는 스탠다드에너지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이와 관련해 약 250개의 핵심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전문 특허 인력을 영입하는 등 특허 보호에도 주력하고 있다.
VIB는 고효율, 장수명, 화재 안전성, 출력 4가지의 장점이 있다. 스탠다드에너지에 따르면 VRFB는 80%대의 에너지효율을 나타내는데 VIB는 90% 이상의 에너지효율을 자랑한다. 또 15년 이상 사용해도 성능을 유지한다. 실험실에서는 10만번 이상까지도 충·방전 테스트를 진행했다고 한다.
VIB는 물을 전해질로 사용하기 때문에 화재로부터 안전하다. 이 회사가 공개한 영상에 따르면 드릴로 VIB를 관통해도 불이 나지 않는다. VIB는 또 리튬이온배터리와 비교해 고출력을 나타낸다. 배터리 충·방전 능력을 나타내는 C-레이트(C-Rate) 기준으로 VIB는 5C(셀 기준 ·1시간에 5번 충전 혹은 방전 가능)의 성능을 보여준다.
대신 VIB는 부피가 크기 때문에 리튬이온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는 떨어진다. VIB를 전기차에 쓰기 어려운 이유다.
VIB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용처는 ESS다. VIB는 화재로부터 안전하며 효율이 높고 수명도 길기 때문이다. 에너지 밀도가 낮다는 게 약점이지만 고출력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리튬이온배터리와 비교할 때 VIB는 출력이 4배 우수하기 때문에 적은 용량이라도 우수한 성능을 낼 수 있고 결과적으로 경제성도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1㎾의 피크 전력을 줄이기 위해 2㎾h 용량의 리튬이온배터리가 필요하다면 VIB는 0.5㎾h의 용량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VIB를 채택함으로써 더 적은 비용으로 리튬이온배터리와 동일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화재로부터 안전한 것은 기본이다.
"리튬이온배터리 대체 아냐, 상호 보완적"
김 대표는 ESS 시장에서 VIB가 리튬이온배터리를 대체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서로 시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저희가 외부에 발표하는 사업계획서의 제목이 ‘천하양분지계’입니다. ESS의 시장을 리튬이온배터리와 VIB가 상호 보완하겠다는 의미이죠."
리튬이온배터리는 전기를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는 용도에 적합한 반면, VIB는 고출력이 필요한 용도에 최적화돼 있다. ESS 시장 초기에는 단순히 에너지를 저장하는 기능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시장이 세분화하면서 고출력 ESS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건설 현장, 데이터센터, 전기차 충전 등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가정에서도 냉난방, 주방 기구 등이 전기화하면서 고출력 ESS의 필요성이 늘어나고 있다. 스탠다드에너지가 최근 선보인 타일 형태의 ESS인 ‘에너지 타일’은 이 같은 수요를 겨냥해서 만든 제품이다.
스탠다드에너지는 현재 파일럿 라인에서 VIB를 생산해 일부 고객사에 공급하고 있다. 올해에는 해외(일본)를 포함해 12곳의 현장에 VIB ESS를 설치할 계획이다.
VIB의 생산 확대를 위해 양산라인을 준비도 한창이다. 일명 ‘브이라인(V-line)’이다. VIB는 세계 최초이다 보니 양산 장비도 직접 설계했다. 김 대표를 포함한 창업 멤버 다수가 카이스트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양산 장비는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완전 자동화로 설계됐다. 김 대표는 "현재 장비 제조업체에서 조립을 마무리하고 있는 상태"라며 "시험 가동 단계에서 양품률이 95%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양산 라인이 완비되면 생산 규모는 현재보다 9배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제품 양산에 맞춰 투자 유치도 진행하고 있다. 김 대표는 "자금 조달뿐 아니라 함께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주요 투자자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롯데케미칼이 2022년 이 회사에 650억원을 투자해 지분 15%를 보유하고 있다.
"14만번 이상 충방전 테스트…ESS엔 냉각장치 불필요"
이날 스탠다드에너지 본사에 있는 연구개발(R&D) 센터를 방문하니 대형 서버실처럼 보이는 방에서 바나듐이온배터리 충·방전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이동영 스탠다드에너지 최고개발책임자(CTO)는 "약 1000개의 바나듐이온배터리를 조건을 달리해 충·방전 테스트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중 가장 오랫동안 테스트한 배터리를 보니 14만5131회를 충·방전했다는 숫자가 표시돼 있었다. 이동영 CTO는 "14만번 이상 충·방전했어도 90% 이상의 효율을 보여주고 있다"며 설명했다. 하루에 2번 충·방전한다고 가정하면 200년을 써도 성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바나듐이온배터리는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적이어서 이론적으로는 거의 무제한 사용이 가능하다. 다만, 스탠다드에너지는 보수적으로 바나듐이온 배터리의 수명을 15~20년으로 얘기하고 있다. 바나듐이온배터리는 -20~50℃의 범위에서 정상 작동한다.
스탠다드에너지 본사에서 차량으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바나듐이온배터리 파일럿 라인도 방문할 수 있었다. 파일럿 라인 1층에 들어서니 바나듐이온배터리 셀을 자동으로 쌓는 스태킹 장비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2층에서 조립한 바나듐이온배터리 셀은 1층에서 50개씩 버스 바(bus bar)로 연결해 패키징한다. 2층은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됐다.
반제품 형태의 바나듐이온배터리팩은 다시 검수 과정을 거친 뒤 바로 이어진 건물로 옮겨져 ESS로 제작되고 있었다. 양원준 스탠다드에너지 제조파트장은 "배터리관리시스템(BMS)까지 직접 개발해 ESS를 제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나듐이온배터리를 이용한 ESS는 기존 리튬이온배터리 ESS보다 구조가 훨씬 단순하다. 외관상으로도 매우 컴팩트했다. 양원준 파트장은 "리튬이온배터리 ESS는 열폭주 등을 방지하기 위해 각종 안전장치나 냉각시스템을 갖추어야 하지만 바나듐이온배터리는 그럴 필요가 없어 구조를 단순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전=강희종 에너지 스페셜리스트 mindl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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