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싱크탱크 "관세는 오히려 반도체 경쟁력 약화"
복잡다단한 글로벌 공급망 갖춘 반도체 산업
관세 부과시 미국 반도체 기업도 부담 우려
바이든 행정부선 "끔찍·무모한 생각" 비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유세 중이던 지난 10월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한 발언이 반도체 업계를 뒤흔들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임기 내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던 반도체지원법을 사실상 없애겠다는 일종의 경고이자 예고였기 때문이다. 미 정부의 보조금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결심한 글로벌 기업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내년 1월 트럼프 2기 행정부 취임을 앞두고 보조금이라는 당근을 주는 대신 관세라는 채찍을 휘두르는 방식에 미국 안팎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반도체 공급망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구축에 수년간 공을 들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도입하려는 관세 부과 전략은 반도체 산업 특성을 고려했을 때 미국과 글로벌 공급망에 득(得)보다 실(失)이 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공급망 갖춘 반도체 산업서 "관세 효과 無"
미국 경제·혁신 정책 싱크탱크인 정보혁신재단(ITIF)은 최근 스티븐 에젤 글로벌 혁신 정책 부사장 명의로 '경쟁력을 조금씩 갉아먹다 : 관세가 미국 반도체 제조를 구할 수 없는 이유' 제하의 논평을 게재했다. ITIF는 첨단 기술 분야 최고 싱크탱크로, 미국 디지털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ITIF는 "고도의 기술이 복합 적용된 산업, 특히 광범위한 공급망에 고차원적인 요소를 집어넣어 생성되는 글로벌 밸류체인 의존도가 높은 산업에서는 관세 부과 효과가 떨어진다"며 반도체 제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언급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1기 행정부 당시에도 중국 등을 상대로 고(高)관세 정책을 쏟아냈다.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값싼 제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국가에 관세라는 수입 제한 조치를 적용하면서 자국 내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미국인의 일자리를 확보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ITIF는 기술 수준이 비교적 낮고 자국 내에서 공급망을 대체할 수 있는 산업에서는 관세 인상이 경쟁력 확보로 이어질 수 있지만, 반도체 산업에서는 그대로 작동하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반도체 산업은 공급망이 복잡하기로 유명한 산업이다. 경영 컨설팅 업체 액센추어 추산에 따르면 기업이 일반적인 IC 반도체를 제작해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는 70개 이상의 국경을 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 장비인 '극자외선 노광장비(EUV)'의 부품 중 하나인 레이저만 해도 46만개에 가까운 구성요소로 이뤄져 있다. 이 레이저도 10만개가 넘는 EUV 부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EUV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제작된 여러 장비가 들어간다. 결국 공장 하나를 구축하려면 공급망이 유기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얘기다.
ITIF는 "경쟁력을 갖추려면 50개국 이상에서 공급받는 구성 요소와 투입물에 비용 측면에서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결국 관세를 올리는 건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비용을 끌어올려 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했다.
"美 반도체 업체가 오히려 관세 부담"
반도체 공급망이 복잡다단하다 보니 미국 기업들이 오히려 관세 부담을 떠안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미국 반도체 업계를 대변하는 미 반도체산업협회(SIA)는 트럼프 1기 행정부 후기였던 2020년 7월 별도의 보도자료를 통해 관세 부과가 반도체 제조 리더십을 결코 돕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 비판한 바 있다.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중국산 반도체 등에 25%의 관세를 부과했는데, 2018년 7월 이후 2년여간 미국 반도체 제조업체가 7억5000만달러(약 1조800억원)의 관세를 감내해야 했다고 SIA는 분석했다. 미국이 중국에서 수입하는 반도체의 60%는 당초 미국에서 제조가 시작돼 글로벌 공급망을 거쳐서 중국을 통해 결국 미국으로 들어오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 업체들이 관세를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반도체 수입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오히려 미국 기업들이 자체 상품에 관세 비용을 치르게 돼 연구개발(R&D)에 투자할 가용 자원이 줄고 경쟁력 저하로 이어졌다고 SIA는 지적했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 중에서도 제조시설 확충에 공을 들이고 있다. SIA가 보스턴컨설팅그룹과 함께 내놓은 반도체 업계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업체의 본사는 둘 중 하나가 미국에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2022년 반도체 전체 밸류체인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8%에 불과했고, 웨이퍼를 기준으로 본 반도체 제조와 관련해서는 미국의 점유율이 10%로 더 떨어졌다. 반도체 설계 등에 강점이 있는 미국이 본사를 자국에 두고 글로벌 공급망을 적극 활용해 반도체를 제조, 수입하고 있다는 의미다.
SIA는 "반도체에 관세를 부과하면 인공지능(AI), 항공우주, 자율주행차, 로봇공학 등 반도체 기술에 의존하는 첨단 기술 부문도 미국 밖으로 내몰 수 있다"고 우려했다.
SIA는 최근에도 이러한 점을 의식한 듯 지난달 트럼프의 당선 확정에 축하 메시지를 전하면서 동시에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지원법을 토대로 보조금을 집행할 때마다 환영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협회는 메시지를 통해 "반도체지원법이 미국 제조업을 강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경제를 성장하게끔 하고 국가 안보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바이든 행정부 "관세 부과는 끔찍한 생각"
복잡한 공급망이라는 특성 외에도 반도체가 소비자에 곧바로 판매되는 최종재가 아니라 자동차 등에 부품으로 활용되는 중간재라는 점에서 관세가 미국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1000~3000개의 반도체를 사용하는데 관세로 반도체 가격이 올라가면 최종 자동차 가격도 저절로 인상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미국이 반도체 제조시설을 건설, 운영하는 과정에서 투입되는 비용이 아시아보다 30% 더 많은 상황에서 보조금으로 비용 차이를 상쇄해야 기업으로서는 미국 내에 공장을 운영하는 유인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ITIF는 "관세는 트럼프 정부가 추구하는 미국 반도체 제조 르네상스를 불러오지 못할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기술 인재 확보 등 미국 반도체 제조 경쟁력을 높일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지원법으로 40개 반도체 투자 프로젝트를 유치한 바이든 행정부도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될까 우려하는 모습이다. SIA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바이든 행정부는 미 전역 21개 주에 27개 반도체 기업이 향후 20년간 386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쏟아붓는 40개 프로젝트를 유치했다. 이를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지원법을 근거로 336억8130만달러의 보조금과 87억달러의 대출을 발표했다.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트럼프 당선인의 관세 정책을 두고 "끔찍한 생각이자 무모한 생각"이라고 혹평하면서 관세만으로는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시설을 확충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한편, 복잡다단한 반도체 공급망에 포함된 국가들은 걱정이 크다. 후공정 부문인 반도체 테스트·패키징 공급망에서 점유율 13%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의 텡쿠 카프룰 아지즈 무역부 장관은 지난 5일 국회에서 미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당선인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의 연합체인 브릭스(BRICS)가 달러 패권을 위협하면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하자, BRICS 진입을 시도 중인 말레이시아가 우려를 표한 것이다. 텡쿠 카프룰 장관은 "100% 관세를 부과하려는 모든 움직임은 글로벌 공급망 혼란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당사자들에게 해를 끼치기만 할 뿐"이라며 반도체 공급망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봤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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