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이 있었던 지난 3일 밤, 유럽 출장을 갔던 지인 A가 다급하게 연락을 해왔다. "도대체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나도 이게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고 답을 하고 말았다. A는 계엄도 놀랍지만 미친 듯이 치솟는 환율에 더 황당함을 느낀다고 했다. 실시간 환율이 반영되는 트래블카드를 식당에서 쓰고 있는데 갑자기 결제하려고 보니까 음식값이 크게 뛴 것 같다는 것이다.
그날은 A뿐 아니라 해외에 있는 우리 기업들의 주재원, 유학생, 여행객들 모두 내가 가진 원화의 가치가 급속도로 떨어지는, 싫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원화로 급여를 받는 우리 기업들의 해외 주재원들은 생활이 더 팍팍해질 테고, 유학생들은 학비가 저절로 올라가는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저절로 가난해지는 체험이다.
정체 중인 우리 국민소득은 우리가 다른 나라에 비해 가난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 중에 하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014년 처음으로 3만달러를 돌파한 뒤 10년째 3만달러대에서 멈춰있다. 정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가까운 시일 안에 국민소득 4만달러를 달성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원화가치가 이렇게 하락한다면 4만달러 달성은커녕 3만달러도 위태한 게 아닐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옆나라 일본을 보면 된다. 일본의 국민소득은 2012년 5만달러를 찍고 계속 내리막을 걸어 이제는 우리보다 낮아졌다. 요즘 일본 청년들이 돈 벌려고 우리나라로 온다고 하던데 괜히 오는 게 아니다.
환율이 앞으로도 쉽사리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원화가치가 오르려면 기본적으로 우리 경제와 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돼 국내에 투자금(달러화)이 더 많이 들어와야 한다. 하지만 내년 우리 경제성장률은 잠재성장률인 2%를 밑돌 전망이고, 우리 주력산업 상당수는 중국에 따라잡혀 경쟁력이 떨어진지 오래다. 심지어 올해 우리 증시 상승률은 러시아나 이스라엘 등 전쟁통인 나라들보다 못하다. 국민들은 원화를 달러로 바꿔서 희망 없는 국내 증시를 떠나 미국 주식에 투자하고 있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경기 부진이 우려되는 한국 증시를 연일 순매도하며 달러화를 챙겨 한국을 떠나는 중이다. 글로벌 달러 강세가 멈추려면 미국이 금리를 빠르게 내려야 하는데 트럼프 당선 이후 인플레이션 우려가 다시 커지면서 미국의 금리인하 속도도 느려질 전망이다. 모두가 다 원화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들이다.
외환당국은 현재 환율 상황에 대해 우리 외환보유액이나 순대외금융자산 등을 감안할 때 감내가 가능한 수준이며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급등이나 급락 같은 과도한 변동성에는 대응할 수 있지만 환율의 자연스러운 흐름에는 대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주값 5000원, 짜장면 8000원의 고물가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듯이 이제는 고환율에도 적응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 결국 원화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키우고, 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등 기초체력(펀더멘털)을 탄탄히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비상계엄 사태가 길지 않았고, 탄핵도 가결된 만큼 이제는 정부와 정치권이 경제살리기에 온 힘을 다해야 할 때다.
이창환 기자 goldfis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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