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경영계에서 완화 요구 빗발쳐
여야, 산업위에서 더 논의하기로
주52시간제 3가지 유연화 시나리오
산업계 요구가 큰 '주 52시간제 유연화' 관련 논쟁이 국회에서 불붙었다. 국회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반도체특별법을 만들고 있다. 여야 의원들은 큰 틀에서 반도체특별법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고소득 연구·개발 인력에 주 52시간제를 예외 적용하는 조항에 있어서는 견해차가 크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근로자는 한 주 간 법정 근로 40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 총 52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다. 이는 2018년 문재인 정부 당시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시행됐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근로 시간 유연화가 시도됐다. 지난해 11월 고용노동부는 "현행 주52시간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업종이나 직종에 한해, 노사(노동자·사용자)가 원하는 경우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1주로 한정하지 않고 선택권을 부여하는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여야 샅바 싸움…반도체 연구·개발 직군 어떻게 하나
국회 산업통상자원중기벤처위원회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원회(산업위 소위)는 지난 21일 반도체특별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반도체특별법은 여야 의원이 모두 각각 대표 발의하는 등 산업 진흥에 대한 공감대가 확인돼 합의 처리가 추진되고 있다. 견해차가 크게 갈리는 지점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조항을 포함할지 여부다. 국민의힘은 반드시 해당 조항을 담은 반도체특별법을 관철하겠다는 입장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당내 '반대파' 의원들이 많지만, 일단 산업위에서는 더 논의한다는 방침이다.
산업위 소위 소속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과 김성환 민주당 의원은 25일 통화에서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조항과 관련해 "추가로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해당 조항은 고소득 전문직에만 근로기준법 적용을 면제받도록 하는 내용으로,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근로시간 면제 제도)'으로도 불린다. 이 조항을 추가 논의키로 하면서 반도체특별법 처리 시일은 이달을 넘길 전망이다.
반도체특별법을 당론으로 발의하면서 속도를 내던 국민의힘은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게 됐지만, 핵심 쟁점 조항인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에 대해서 간극을 좁힐 시간을 확보했다. 오는 12월 중 산업위 추가 논의가 예고됨에 따라 조항 추가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회 산업위원장은 국민의힘 소속 이철규 의원이다.
민주당 내에는 '특별법으로 근로기준법을 우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다수다. 민주당 정책위원회는 국민의힘 당론인 반도체특별법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A4 용지 5쪽 분량으로 작성한 바 있다. 진성준 정책위의장은 "반도체 산업만 특별 대우한다면 다른 업계에서도 다 요청하지 않겠냐"며 "근로기준법에 파열을 내려고 하니까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금융노조 출신인 박홍배 의원은 "근로시간은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며 "정부의 경제·산업 정책 실패로 인한 위기를 근로시간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경우 이 문제에 유연한 입장을 밝혀 눈길을 끈다. 이 대표는 지난 20일 한국무역협회 회장단을 만난 자리에서 "(유연화가) 실질적으로 꼭 필요하다면 엄격하게 제한해 추가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지낸 권칠승 의원도 통화에서 "산업별로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은 돼야 한다"고 밝혔다.
"근로시간 규제 풀어달라"…빗발치는 재계·경영계 요구
재계와 경영계에선 52시간 근로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한국경총) 회장은 지난 11일 이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근로 시간에 대한 근로자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유연근무제 개선,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 등을 건의했다.
한국경총은 올해 초 '장시간 근로자 비중 현황 및 추이 국제비교' 보고서에서 한국이 더는 장시간 근로 국가가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 주 50시간 이상 근로하는 사람의 비율이 10.3~12% 수준으로 OECD 평균(10.2%)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봤다. 또 주 60시간 이상 근로자의 비중은 기준에 따라 2.7~3.2% 정도로 오히려 OECD 평균(3.8%)보다 낮다고 주장했다. 즉 한국은 더는 장시간 근로하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근로시간을 규제하는 제도보다는 유연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근로시간 규제 장벽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독일, 영국 등은 법정근로시간을 주 또는 일 단위로 설정했다. 한국은 일(8시간) 단위와 주(40시간) 단위 모두 설정해 이중으로 근로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고소득 전문직의 근로시간 규제를 제외하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독일은 연장근로시간을 자신의 계좌에 저축하고 휴가나 휴식이 필요할 때 자유롭게 꺼내 쓰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도 재해·재난, 돌발상황 수습, 업무량 폭증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현행 근로기준법에 마련된 특별연장근로 제도를 통해 최대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 다만 인정되는 요건과 절차가 까다롭고, 1회 4주 이내·1년 90일 이내로 기간이 제한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주 52시간제를 '금과옥조'로 여길 필요는 없다"며 "업종별로, 기업마다 사업 목표가 다른데 일률적으로 근로 시간을 묶어놓는 것은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주 52시간제 유연화 3가지 시나리오
만일 민주당 반대로 반도체특별법에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조항이 담기지 못한다면, 세 가지 시나리오를 통해 유연화 방안을 고민해볼 수 있다. 민주당이 이 조항에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다. 먼저 특별법 조항만으로 '주 52시간제'라는 원칙을 흔들면 근로기준법이 유명무실해질 것이라는 우려다. 두 번째는 현행 제도에도 특별연장근로를 할 수 있는 창구가 있기 때문에 추가 완화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에서 반도체특별법 제정 '키'를 쥐고 있는 의원은 삼성전자 사장 출신 고동진 의원이다. 고 의원은 연내 반도체특별법 처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민주당과 합의 가능한 부분을 정리해 우선 보조금 지원을 담보하는 반도체특별법을 제정한 후 추후 법 개정을 통해 조항을 추가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민주당이 언급하는 근로기준법에 포괄적 차원의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담는 것이다. 근로시간 규정의 '모법(母法)'으로 여겨지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는 일은 법리적으로도 가장 적절하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근로기준법 소관 상임위원회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인데, 환노위에는 노동계 출신 민주당 의원이 다수 포진해 있다.
또는 민주당이 현행 제도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근로기준법상 특별연장근로 인가 절차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산업 현장에서는 쉽게 사용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이 제도를 이용한 사례는 5230건으로,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국내 5인 이상 사업체의 0.7%에 불과하다. 최대 근로시간도 주 64시간이다. 지난해 정부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특별법'으로 소부장 기술 연구개발(R&D)을 특별연장근로 대상으로 지정했다.
오지은 기자 joy@asiae.co.kr
최영찬 기자 elach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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