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혁 주도 인맥·부패와 싸워
동남아 민주화 희망의 상징
첫 수평적 정권교체·연립정부
권력 기반 취약해 지지율 추락
남부 메가시티 프로젝트 추진
정적 껴안으며 정권 안정 나서
한국과 상호보완적 교역 구조
다음주 국빈 방한해 협력 논의
동남아시아에서 말레이시아의 안와르 이브라힘(77)만큼 민주주의 정신을 구현한 인물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청렴과 개혁, 그리고 참을성으로 특징 지어진 그의 정치 여정은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정치 지형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역에 민주적 거버넌스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안와르는 청년 시절(1970년대) 사회 정의와 이슬람 개혁을 옹호하는 열렬한 학생 활동가로 시작했다. 말레이시아의 오랜 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서 정치에 뛰어든 그는 민족과 종교적 분열에 깊이 뿌리 내린 시스템을 개혁하는 현대화의 기수가 되었다. 1990년대 부총리로서 그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시기 경제개혁을 주도해 인맥과 부패에 찌든 말레이 기득권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정치적 역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1998년 안와르는 부패와 남색(男色) 혐의로 투옥되었다.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투옥, 공개적 굴욕, 정치적 망명을 거치면서 안와르는 심각하게 양극화된 사회에서 통합적 인물로 부상한다. 도가 넘은 부패에 분노한 국민들은 2018년과 2022년 연속 안와르의 복권을 지지한 것이다.
◆다음 주 한국 국빈 방문=오랜 인내 끝에 2022년 말레이시아의 10대 총리로 집권에 성공한다. 구태의연한 엘리트 정치와 인종 정치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사상 첫 수평적 정권 교체의 주역이 된 것이다. 다만 의석수는 부족했기에 분열된 국가 간의 화해를 강조하며 연립 정부를 꾸린 점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그가 다음 주 한국을 국빈 방문해 양국의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26일(화)에는 서울대 특별 초청 강연도 예정돼 있다. 양국은 안와르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내년 한·말레이시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에 보다 속도를 낼 전망이다.
말레이시아는 아세안 가입국 가운데 한국과 교역 3위, 투자 4위로 상당히 긴밀한 국가다. 지난해 한국은 말레이시아로부터 152억달러어치를 수입하고 97억달러를 수출해 무역수지는 55억달러 적자였다. 한국은 말레이시아로부터 반도체, 천연가스, 석유제품 등을 수입한다. 말레이시아는 동시에 한국으로부터 석유 제품과 반도체, 정밀 화학 원료 등을 수입하는 상호보완적인 교역 구조를 갖고 있다. 동남아에서 영어를 쓰는 기술중심주의 국가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대만의 반도체 생태계와 긴밀하게 연결돼 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AI) 및 첨단 기술 산업을 집중 육성 중이다.
◆2년 만에 인기 추락=그는 최근 중국과 러시아 등을 돌며 말레이시아의 지정학적 가치를 높이려고 노력 중이다. 2025년 아세안의 의장국이 바로 말레이시아이다. 안와르가 아세안의 의제를 이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집권 3년 차를 바라보는 그의 지지율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 여러모로 권력 기반이 흔들리는 모습까지 관측된다. 그의 집권 여정은 고무적이었지만, 그의 권력 기반은 취약하고 경제개혁 구호는 쉽사리 현실을 바꿔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미·중 경제 전쟁 속 추락하는 경제 문제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식품 가격 상승, 임금 정체는 말레이시아 중산층과 청년층을 크게 압박하는 중이다. 여기에 자국 통화(링깃)는 계속해서 추락해, 수입 비용을 증가시키고 구매력을 감소시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다.
안와르의 총리 등극은 2022년 다수당이 없는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한 한시적 연립 정부다. 파카탄하라판(PH)의 연합 소속인 안와르는 집권을 위해 과거 부패 혐의로 실각한 통일 말레이 국민 조직(UMNO)과 같은 라이벌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선택은 불가피했지만 동시에 복잡한 이해관계 조정 때문에 대담한 개혁을 막아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아가 안와르의 다인종적 포용 정책은 극우 말레이-무슬림 정당(PAS)의 극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스칸다라 프로젝트 재도전=안와르 역시도 자신의 개혁이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4년 집권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미 정치에 은퇴해야 할 나이지만 그가 실패한다면 개혁적 후배 정치인들의 집권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 다시 꺼내든 카드가 바로 ‘이스칸다르(Iskandar) 프로젝트’의 부활이다.
이스칸다르는 조호르 남부의 넓은 지역으로, 조호바루, 누사자야(현재 이스칸다르 푸테리 및 주변 지역)와 같은 도시를 지칭한다. 쉽게 보면 싱가포르 접경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오랜 기간 말레이시아에서 개발이 덜 된 땅이었다. 마하티르 총리 시절에는 수도 쿠알라룸푸르 인근 ‘푸트라자야’를 신수도로 결정하고 이 수도권 개발에 국력을 집결했다.
하지만 2006년 나집 라작 총리가 등극하면서 푸트라자야 개발을 멈추고 갑작스레 남부 이스칸다르 메가시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싱가포르와의 근접성을 활용하여 조호르 남부를 주요 경제 허브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푸트라자야는 행정 수도로서 성공했지만 목적이 관료주의적이었기 때문에 활기찬 경제 중심지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명분은 내세웠다. 이는 전임 마하티르 총리의 영향력을 거부한다는 뜻도 담겼다.
나집의 이런 결정은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부패의 고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당초 안와르도 이러한 정책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아직 쿠알라룸푸르와 그 주변 클랑밸리의 수많은 신도시도 산업이 정착을 못 했는데 저 멀리 남쪽에 메가시티를 짓는다는 것은 국력을 낭비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안와르의 입장은 180도 바뀌었다. 이스칸다르 지역개발청(IRDA)과 협력하여 수천억대의 신규 투자를 끌어낸 것이다. 싱가포르, 중국, 중동에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해. 교육, 의료, 물류, 제조, 관광 등의 신산업 성장에 승부를 건 것이다. 이를 통해 남부의 경제 성장을 재분배하고 개발을 장려하여 지역 간 경제 격차를 줄이겠다는 복안이다. 조호르-싱가포르 경제특구(JS-SEZ) 부활 논의까지 활기를 띠고 있다.
당초 남부 메가시티 계획에 부정적이던 안와르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데는 여러 정치적 이유가 있다는 평가다. 우선, 자신과 극력하게 대립하던 나집 전 총리 세력을 껴안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재 국왕이 조호르 술탄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즉, 자신을 비토하던 왕실과 귀족 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면서, 동시에 싱가포르와 화교계 자본을 신도시 건설 계획에 참여시켜 정권의 안정성을 높이겠다는 복안이다. 이를 통해 차기 선거에서 현재의 연립 정부의 수명을 연장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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