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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베테랑과 백설공주 가로막은 '격노'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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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 견해나 보급된 절차를 진실이라 착각
계획에 의구심 들어도 비판하지 않는 집단들
의료공백 등 현실과 먼 정책…배경은 '격노'
'베테랑2'·'백설공주…' 권력자 자기제어 요구

배우 권해효는 최근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경찰로 등장한다. 영화 '베테랑 2'에선 강력범죄수사대 총경,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선 경찰서장이다. 전자는 자신의 안위만을 챙긴다. 복잡하게 얽힌 사건을 서둘러 종결하려 한다. 눈앞의 왜곡된 증거와 자료를 진실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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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는 사건의 진실을 알면서도 조작하고 은폐한다. 마을 주민들과 입을 맞추고 무고한 사람을 살인죄로 옭아맨다. 다수의 목소리가 모이면서 주장은 진실로 굳어진다. 누구도 누명을 씌운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걸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권해효가 연기한 경찰 같은 권력자 말이라면 더 그렇다. 이런 현상을 '사회적 증거'라고 한다. 대중적 견해나 보급된 절차를 진실이라 착각한다. 때때로 비극적 결과를 초래해도 집단적 착각이라 인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포털 사이트나 소셜 네트워크만 봐도 알 수 있다. 인터넷 사용자 대부분이 '좋아요', '공유', '리트윗'이 많은 뉴스를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간주한다. 소셜 네트워크 봇(Bot) 또한 이런 흐름에 사회적 힘을 싣는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붙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경험할 뿐이다. 똑같은 생각에서 좋은 것이 생겨날 리는 만무하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높은 지능과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들이 왜 부분적으로 이상한 결정을 내리는지 연구했다. 그는 피그만 침공 작전에 주목했다. 미국이 1961년 피그만에서 CIA를 앞세워 쿠바를 침공해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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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재니스는 원인을 계획 단계에서 모든 관계자가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아무도 이 작전을 비판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등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른바 '집단사고'는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같은 의견을 지니고 서로에게서 자신의 의견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혹여 어떤 계획에 의구심이 들더라도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어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생각에 복종하고 집단에서 바라는 행동을 따른다.


'베테랑 2'의 서도철(황정민) 형사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의 살인 전과자 고정우(변요한)는 이 견고한 벽에 맨몸으로 부딪힌다. 전자는 진범을 잡기 위해 수사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후자는 이미 10년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누명을 벗고자 알리바이를 찾아 나선다.


각각의 시도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거나 외면당한다. 반대편에서 문제의 범위가 확대되길 바라지 않아서다. 새로운 문제가 생기거나 집단 내 구성원들이 서로 채찍질하는 상황을 애써 경계한다.


정치판에서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한편에서는 우파들이 의기투합해 외국인과 무슬림, 젠더 연구 지지자들을 욕하며 자신들의 국가가 망해간다고 슬퍼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좌파들이 합심해 인종차별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 포퓰리스트들을 비방하고 대규모 투쟁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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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논의하는 건 두 진영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다. 고래고래 소리치거나 아예 입을 꾹 닫아버린다. 그렇게 집단 구성원이 가진 같은 생각 속에 자신을 봉인해버린다.


애덤 스미스는 감정들의 작용이 인간을 사회질서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정의는 해로운 행위를 당한 이의 분노에 대한 우리의 동감에 근거한다. 정의를 법 형태로 구체화한 것 또한 분노에 대해 본성적으로 가지는 혐오 때문이다. 이런 법을 따르는 배경에는 타인과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비난에 대한 공포가 자리해 있기도 하다.


분노와 혐오, 공포 모두 인간의 감정이다. 권해효가 연기한 경찰들은 그 산물인 법의 집행자다. 타자와의 권력관계에서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 드러내는 감정이 주변을 법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몰아넣을 정도다. 그것을 마주한 주변인은 부당한 명령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권력자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기에 딱 좋은 환경을 만든다.


어느덧 7개월째 이어지는 의료공백이 대표적 예다. 응급의료 역량이 한계에 달했으나 정부의 진단은 현장과 온도 차를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여러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 비상 진료체계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여론의 반발이 빗발치자 지난 4일 경기도의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찾아 "국가에서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도와드리지 못한 것 같아 참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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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의 배경에는 '격노'가 있다. 올해 대통령의 감정 상태로 자주 거론되는 감정이다. 국민의힘에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설 당시 김기현 전 대표가 사퇴를 거부하자 격노했다는 보도,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선 뒤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을 총선 뒤 조건부로 검토한다는 말이 나오자 이에 대해 격노했다는 보도, 심지어 방미 기간 블랙핑크 공연이 무산되자 격노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스미스는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는 일을 두고 '허영심의 발로'라고 했다. "허영심에 찬 연약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 혹은 자신에게 감히 반대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흔히 격앙된 감정을 과시해 드러내 보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기백을 보이는 것으로 상상한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분노, 증오, 질투, 악의, 복수심 같은 감정들은 유대를 깨뜨리는 경향이 있다. 과다하면 공포나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베테랑 2'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그런 권력자들에게 자기제어를 요구한다. 전자는 영어 제목부터 'I, The Executioner'이다. '집행자'라는 뜻이지만 '살인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제목은 동화 '백설공주' 속 여왕의 악의를 극단적으로 가리킨다. 그가 백설공주에게 느낀 감정은 질투와 증오, 격노였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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