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아이돌'로 당대 선풍적인 인기
스타일 따라한 '세이코 컷' 대유행
연이은 스캔들에 매스컴 오르내리기도
딸 사망 이후 방송 출연 없어
뉴진스 하니가 '추억 소환'
"아~와따시노 코이와~(あ?私の?は)" 이 노래 요즘 그야말로 대유행 중이죠.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인데요. 아이돌 뉴진스 멤버 하니가 도쿄돔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일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사실 마츠다 세이코는 노래도 노래고, 영원한 아이돌로 기억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풍파를 겪은 연예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한 '세이코 열풍'에 가려졌던 그의 삶에 대해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원래 기사에서 마츠다 세이코의 이름은 성을 따서 마츠다로 표기하는 것이 맞지만, '세이코'로 부르는 것이 워낙 일본, 한국 팬 사이에서도 익숙하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는 마츠다 대신 세이코로 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수 되는 길도 험난했던 세이코…아버지 반대 부딪혀
1962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마츠다 세이코의 원래 이름은 카마치 노리코입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고 집안도 나름 지역에서는 꽤 전통 있는 곳으로 부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신인 가수 오디션에 응모하는 등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꾸기 시작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해인 1978년 일본 CBS·소니와 잡지사 슈에이샤가 발간하던 '세븐틴'이 주최한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 규슈 지방 오디션에 응모합니다. 그리고 규슈 대회에서 1등을 하죠. 다음에는 전국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부모님 몰래 신청한 것이라 발목을 잡게 됩니다. 아버지는 세이코가 가수가 되는 것을 결사반대했고, 결국 전국대회는 나가지 못하게 되죠.
한편 이 전국대회에서는 프로듀서인 와카마쓰 무네오씨가 신인 발굴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딱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그는 각 지역 참가자들의 데모 테이프를 가져와 듣게 되죠. 그러다가 규슈 대회의 세이코 노래를 듣는 순간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와카마쓰는 당시를 "여름 끝자락 태풍이 지나간 후 맑은 하늘을 봤을 때와 같은 충격"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아버지는 세이코가 가수보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남들처럼 대학에 가기를 원했고, 계속해서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프로듀서인 와카마쓰 씨가 직접 설득하러 도쿄에서 후쿠오카까지 찾아가기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죠. 하지만 세이코도 꿈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죠. 세이코는 도쿄 친척 집에 놀러 간다며 외박 허락을 받고 도쿄로 향했습니다. 사실 친척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와카마쓰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죠.
이런 식으로 계속 노력(?)한 끝에 결국 아버지가 두손 두발을 들게 됩니다. 후쿠오카로 와카마쓰를 불러 "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가출하겠다고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부모로서는 이제 세이코의 꿈을 이뤄줄 수밖에 없다"며 "와카마쓰 당신에게 맡길 테니 책임지고 맡아달라. 나는 당신을 믿는다"고 하게 되죠.
예명에 관련한 여러 이야기
본명보다 더 유명한 예명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존재하는데요. 일단 무엇이 정설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고, 기사에도 유래가 여러 개 혼재돼 지금까지 나온 분석을 모두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가수 데뷔 전 출연한 드라마 '오다이지니'에서 마츠다 세이코라는 등장인물을 맡아 연기했는데, 이 이름이 딱 맞아떨어지듯 친숙하게 느껴져 쭉 예명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유래는 '작명설'인데요. 우리나라 무당처럼 영적 능력이 있다고 유명한 나고야의 오키 히로코라는 사람이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입니다. 일본 주간포스트라는 매체에서 2015년 소개한 기사가 있었는데요. 이 사람이 연예인 예명을 잘 짓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소속사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는 세이코의 사진 한 장, 본명, 생년월일을 주고 당시 가장 유명했던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름을 달라고 했다는데요. 이 무당이 아이자와 회장의 에너지를 느낀 뒤 이를 연결 지어 획수에 맞는 한자를 정해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 밖에도 당시 잘 나가는 시계 브랜드 세이코처럼 유명한 가수가 되라고 본떠 만들었다는 등 여러 해석이 있었습니다.
선풍적인 인기…'영원한 아이돌' 전설로 등극
세이코는 1980년 '맨발의 계절'로 가수 데뷔를 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 소속사 사장이 무당에게 세이코가 뛰어넘었으면 좋겠다는 야마구치가 은퇴했을 시기였죠.
청량한 노랫소리와 귀여운 외모로 세이코는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대히트를 친 '푸른 산호초'는 맨발의 계절이 발표된 이후 두 번째 곡이었죠.
또 특유의 폭신폭신한 모양으로 흔들리는 단발머리 스타일은 '세이코짱 컷'이라며 선풍적인 유행을 만들죠. 1981년 단발머리로 자르고 나오자 단발머리도 당시 유행하게 됩니다. 아마 뉴진스 하니가 짧은 단발로 이 노래를 불렀을 때 많은 일본인이 향수에 젖은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세이코를 발견한 와카마쓰 프로듀서와 더불어 유명 작사가 마쓰모토 다카시 등이 붙어 '세이코 프로젝트'로 불리는 체제를 설립하는데요. 특히 마쓰모토는 기존 일본 엔카와 다르게 "당신이 좋다", "싫다" 등 그간 감춰왔던 여성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가사를 써주면서 밝고 긍정적인 세이코의 이미지를 한층 더 쌓아 올리게 됩니다.
실제로 세이코는 데뷔 이래 40개 이상 음악상을 받았고, 싱글차트는 24곡 연속 1위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죠. 또 미국에도 진출한 적이 있어 빌보드 차트인도 했었고, 2005년 대만에서 발매된 음반은 첫 등장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에는 일본 부도칸 100회 공연을 갱신, 여성 아티스트 역대 1위 공연 횟수를 달성했죠. 한마디로 일본에서는 전설의 아이돌로 등극하게 됩니다.
'전설의 아이돌'도 막지 못한 스캔들
잘 나가지만 언제나 안티 팬은 있는 법이죠. 당시에도 이것이 일장일단이 있었나 봅니다. 귀여운 척을 너무 많이 한다며 일본어로 '귀척'을 뜻하는 '부릿코(ぶりっ子)'라는 별명도 붙었었고요.
특히 세이코는 스캔들에 많이 휩쓸렸습니다. 한국 언론도 비슷한 시기 세이코를 '일본의 마돈나'라며 스캔들에 대한 내용을 보도했었는데요. 자세하게 소개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세이코는 처음 데뷔 이후 팬의 입장에서 꾸준히 좋아했었던 고 히로미와 교제 사실을 공개했었으나 3년 만에 이별했죠. 이별 후 한 달 만에 배우 칸다 마사키와의 열애설이 터졌고, 두 달 뒤 결혼을 발표하고 슬하에 딸 칸다 사야카를 낳습니다. 결혼 생활은 12년간 유지했다가 이혼했으나, 결혼 생활 중에도 여러 스캔들이 터졌었는데요. 연예계 공식 커플로 알려진 남성과도 함께 있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논란으로 홍백가합전 후보에서 빠지게 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었죠.
여기에 자녀 소식으로 또 언론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당대 최고 인기 가수의 자녀로 딸인 칸다 사야카는 태어날 때부터 언론의 관심을 굉장히 많이 받았었는데요. 2014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주인공 안나의 일본 성우를 맡는 등 연예계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갑니다. 그러던 중 2021년 돌연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당시 만나던 사람에게 폭언 등 교제 폭력을 당한 정황이 드러나게 되면서 일본 연예계가 발칵 뒤집힙니다. 특히 가해자가 당시 가면라이더에 출연하기도 했던 유명 배우 마에야마 타카히사로 지목되면서 논란이 가중됐죠. 여기에 "세이코의 여러 스캔들로 딸이 우울했던 것"이라는 여론의 비판까지 따라붙습니다.
뉴진스가 만들어낸 신드롬…추억 소환에 재조명
딸의 사망 이후 세이코는 TV 프로그램에는 출연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일본 연말 가요축제인 홍백가합전을 앞두고 있었고, 이를 취소했었는데요. 이후 홍백가합전에도 출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전에 홍백가합전에 딸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어 더 출연을 결정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다만 콘서트는 개최하고 있어서 아직 슬픔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팬들 앞에서만 노래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렇게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보니 어쩌다 세이코가 길거리에서 포착되기라도 하면 많은 추측이 돌았는데요. 지난해에도 세이코가 마스크를 쓰고 카페에서 회사 관계자들과 이야기했는데, 급격하게 마른 모습이었다면서 심적으로 아주 힘든 것 같아 보인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뉴진스 멤버 하니가 푸른 산호초를 부르면서 이것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죠. 일본에서도 이 열풍에 대해 분석하는 기사들이 참 많이 나왔는데요. 일단 1980년대 일본의 경제 호황기에 불렸던 노래기 때문에, 잃어버린 30년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중장년 세대에게 당시를 회고할 기회를 줬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일본은 1960년 중반부터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는데, 1980년대 들어서는 2030 젊은 세대도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하죠. 또 당시 엔고로 일본에서는 '해외여행 붐'이 일었고, 여기서 "사랑이 남쪽의 바람을 타고 달려간다"라는 푸른 산호초의 가사, 요트 등 이국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뮤직비디오는 1980년 일본의 감성을 보여주기 충분하죠.
이 노래가 인기를 끌던 당시 한국은 군사독재와 민주화 운동을 겪고 있었어요. 데일리신초는 이러한 배경 때문에 한국의 중장년 세대에게 1980년 일본의 시티팝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존재였고, 한편으로는 이 노래가 한국의 당시 어두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감정이 들게 할 것이라고도 밝혔는데요. 또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 "오겡끼데스까"라는 대사로 큰 히트를 했던 영화 '러브레터'에 이 노래가 나왔었는데, 이 때문에 다들 어디서 들어본 추억의 노래라는 느낌을 줬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60대 남성이 하니가 부르는 푸른 산호초 동영상에 "암 투병 중인데 이 노래를 듣고 용기를 얻었다. 암을 이겨내겠다"라고 댓글을 달았는데, 여기에 한국인들이 "힘내서 극복하자", "완치를 기원한다"고 응원하면서 이 내용이 또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일본에서 한국으로 흘러들어온 노래가 2024년 다시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 다른 추억을 만드는 모습이네요. 노래 하나로 시작된 양국의 열풍이 참 신기하고 반갑습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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