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작품 속 실제 삶 등장
그 사람 인생 바꿀 수 있어 주의
누군가 내 삶 말하는 건 못 막아
이야기는 우리 삶을 엮어 짜는 것
재현의 윤리가 다시 사회적 논쟁이 되고 있다. 문학 작품에서 타자의 실제 삶을 이야기할 때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며,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이다. 발화의 계기는 정지돈의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와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이다. 열흘쯤 전에 한 여성이 이 소설에서 작가가 스토킹 경험, 가족사 등 자기 인생 이야기를 임의로 인용했다면서, 그로 인한 정신적 상처와 고통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과거에 연인이었다는 점, 여성이 실제 스토킹으로 인해 고생했고 이를 작가에게 자주 하소연했다는 점, 작품 속 인물과 이름이 같다는 점, 가족사가 비슷하다는 점 등으로 보아 그 주장은 사실일 것이다.
올해 초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호모 헌드레드’가 "자기 삶이 소설 속에 무단으로 박제됐다"는 호소로 인해 논란에 휩싸였다. 소설은 가상 언론사 안경보건신문사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는데,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옛 동료 기자들은 소설에 묘사된 여러 어두운 이야기 탓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면서 작가의 윤리성을 문제 삼았다.
문학계에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2021년엔 한 항구도시에서 함께 자란 여고생들의 우애를 담은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민음사)이 유사한 논란에 휩싸였다. 작가의 한 친구가 소설에 자기 사생활이 담기는 바람에 주변인들에게 강제로 성 정체성이 공개되었다면서 작가를 비난하고 나섰다. 성소수자가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상황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사려 깊지 않은 행위란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작가와 출판사의 대응은 비슷했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서 당사자가 피해를 호소하고, 이에 공감한 독자들이 항의, 불매 등 집단적 압력을 행사하면 작가가 사과와 함께 자기 입장을 알리고, 출판사는 별 책임감 없이 해당 도서를 판매 중단하는 행위의 반복이었다. 정지돈 작가 사건 역시 당사자 호소 이후 열흘도 안 돼 서둘러 사태를 봉합해 버렸다.
그러나 재현의 윤리 문제는 작가에게 옐로카드 또는 레드카드를 내미는 것으로 끝낼 만큼 단순하지 않다. 예술이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파괴할 힘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일찍이 수전 손택이 말했듯, "카메라가 총의 승화이듯,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 승화이다." 우리는 작품 속에 주변 사람들의 삶을 새겨 넣음으로써 그 사람의 실제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은 작품의 한 존재 이유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한 사회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면, 그 작품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피해가 누적되기 전에 당사자가 작품의 효력을 서둘러 정지시키려 하는 건 당연할 수 있다.
예술의 이런 변화력은 또한 한 작가가 타자의 삶을 재현하는 데 극도로 주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칫 타자의 삶과 고통이 만인에게 강제로 전시돼 조롱당하거나 훼손되거나 파괴될 수 있는 까닭이다. 아무리 대단한 작품도 누군가의 삶보다 우선할 수 없기에 작가들은 타자를 이야기할 땐 항상 그 삶의 앞뒤를 조심스레 살피면서 신중히 입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몇 가지 함께 생각할 점이 있다. 우선 타자가 내 삶을 이야기할 때, 사전 허락이나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발상은 다소 놀랍다. 물론 내가 살아낸 삶은 온전히 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그 삶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리 독특해도,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같이 깊이 관계 맺은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고, 나와 우연히 시공간을 함께한 이들의 것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인류는 타자의 이야기를 가져와 내 이야기로 만드는 힘을 통해, 즉 모방과 공감의 능력을 통해서 윤리를 구축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해 왔다.
‘감정의 격동’(새물결)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말했다. "연민은 우리 상상을 타자의 선함과 연결하고, 타자를 우리의 집중적인 배려 대상으로 만드는 한편, 윤리적 인식을 확대하고, 어떤 사건이나 정치에 내재한 인간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 상상 안에 타자의 삶을 가져와서 이야기로 안치하지 않고는 어떤 윤리도, 인간적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에 대한 재현을 포기하는 순간, 공동체도 사라진다.
더욱이 우리는 타자가 내 삶을 말하는 걸 막을 수 없다. ‘홀로’인 인간이 타자와 함께 살면서 감정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며, 이런저런 이야기의 주연과 조연으로 등장해 다채로운 이야기를 남기는 일이 곧 우리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이야기에 여기저기에 수시로 등장하는 ‘나’가 없다면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 일을 잘 못했다고 버럭 화를 낼 순 있어도, 내 삶의 이야기에 대한 배타적 소유를 주장하는 건 어리석을 뿐이다. 타자의 삶을 말하는 데 허락이 필요 없다. 이는 그 이야기의 결과에 대한 윤리적, 법적 책임을 따지는 것과 별개의 문제이다.
이야기는 본래 자기 삶과 타자의 삶을 엮어 짜서 그리는 거대한 벽화와 같다. 발터 베냐민은 말했다. "이야기하는 자는 이야기할 내용을 경험에서 얻는다. 직접적 경험일 수도 있고, 들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는 자신의 그러한 경험을 다시 듣는 사람의 경험으로 만든다." 경험은 이야기의 유일한 원천이기에, 타자의 이야기를 배제한 순수한 나의 이야기, 현실을 모방하지 않고 전적인 몽상으로 빚어낸 이야기, 현실로 조금도 환원되지 않는 완벽한 상상의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호모 나렌스(Homo Narrens), 날것의 여러 가지 경험을 모아서 이야기로 엮어 짜는 과정에서 깊은 의미를 발굴하고 숨은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인류의 본질이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도 이러한 이야기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능하지 않은 것을 작가에게 요구하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침묵을 강요할 수 있다. 작가에게 요구할 것은 재현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뿐이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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