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단골 손님 확보 유리
'울며 겨자먹기' 할인 전략
지난 15일 오후 6시께 찾은 서울 동작구 이수역 인근 먹자골목. 이 골목의 상당수 식당들이 ‘소주·맥주 1500원’, ‘주류 2000원’이 적힌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었다. 이처럼 주류 할인 이벤트를 진행 중인 식당들은 대부분 손님들이 가득 들어찬 모습이었다. 시민 정재현씨(29)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할 때는 아무래도 술값이 싼 곳을 더 찾게 되는 것 같다”면서 “이런 곳들이 많아져 외식 부담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부담스러워질 정도로 물가가 고공행진 하는 가운데 오히려 파격적으로 술값을 할인해 단골의 발길을 잡는 식당이 늘고 있다. 고물가 시대에 역행하는 술값을 내세워 탈출구를 찾는 것은 식당들의 ‘벼랑 끝 전략’으로 풀이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주의 소비자물가지수는 2021년 100.58에서 올해 4월 108.64로, 맥주는 100.17에서 112.46으로 크게 올랐다. 실제로 서울에서도 강남이나 송파 등 이른바 강남 3구에 위치한 술집이나 식당들의 경우 소주 1병을 8000~9000원에 파는 곳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고물가 현상이 지속되면서 소비도 위축되고 있다. 한국은행이 실시한 ‘2024년 4월 소비자동향 조사’에서 4월 소비자심리지수는 전달과 같은 100.7로 나타났는데, 물가와 금리부담 장기화로 인해 소비 여력이 둔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가운데 유동 인구가 많은 번화가가 아닌 지역 주민들이 주요 고객인 곳들을 중심으로는 술값이 시대에 역행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주로 서울 양천구나 동작구를 비롯해 인천과 경기도 등지에서 소주나 맥주 1병을 1500~2000원에 판매하는 식당들이 늘고 있는 것. 이 같은 주류 할인 이벤트는 단골손님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 동작구의 한 고깃집 사장 송모씨(26)는 “주류 가격을 할인하는 곳이 많아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우리도 최근 술 가격을 내렸다”며 “한 달째 2000원으로 판매하고 있는데 손님들 반응이 좋아 적어도 올해까지는 할인을 계속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고깃집 매장 관리자 김철익씨(27)도 “주류세까지 고려하면 한 병당 1500원 이상 지불하고 술을 가져오는 것을 감안하면 남는 게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면서도 “우리 가게를 모르던 주민들도 ‘소주를 싸게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오고, 지인들에게도 소문을 낸다”고 웃어 보였다.
시민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만난 이모씨(27)는 “요즘 뭐든 다 비싼 것 같다”면서 “고깃값이 비싸다 보니까 술값이라도 아끼고 싶어서 할인 이벤트 하는 곳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손모씨(34)도 “강남에서 술 마실 땐 소주 한 병에 1만원 하는 곳도 봤다”며 “동네 식당들이 경쟁적으로 소주를 1500원이나 2000원 정도로 판매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오게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고물가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설명한다. 황진주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식당에서 파는 술값이 비싸져 주민들 입장에선 굳이 동네 식당을 찾지 않고 마트에 가서 술을 사 먹는 게 낫다고 판단할 것”이라며 “따라서 동네 음식점이나 술집에선 이윤을 포기하더라도 일단 고객을 모아 매출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도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고물가에 시달려왔다”며 “그동안 품질이 떨어진다고 평가됐던 중국 업체 알리익스프레스·테무 같은 곳을 통해 식자재를 구매할 정도로 초저가를 쫓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업자 입장에서는 소비자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마진을 거의 남기지 않으면서 손님이라도 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심성아 기자 hear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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