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수요 둔화 속에 지난 1분기 저조한 성적표를 받아든 국내 배터리셀 기업들이 올해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서는 모습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2024년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필수적인 신·증설 투자는 선택과 집중으로 지속하겠으나 투자 우선 순위를 철저히 따져보고 투자 규모 및 집행 속도를 조절하고 시설투자(CAPEX) 집행 규모를 낮출 것"이라고 밝혔다. SK온도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비우호적인 업황에 대응하고자 유럽 및 중국의 설비 증설 시점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겠다"고 설명했다.
다만 삼성SDI는 "고금리와 글로벌 경기 회복 지연의 영향으로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단기적으로 단소 둔화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높은 성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이미 확보한 헝가리, 말레이시아 공장, 미국 합작공장 신규 건설 투자를 차질없이 진행하겠다"고 설명했다. 삼성SDI는 전년 대비 투자 규모가 상당 수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배터리셀 3사 가운데 삼성SDI를 제외한 두 곳이 올해 투자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기업들과 협력하던 파트너사들 역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배터리 장비 업체들의 수주 물량에도 일정 변화가 예상된다.
배터리 장비 기업들은 그동안 셀 기업들이 국내외에서 대규모 증설 계획을 발표할 때마다 수혜를 받아왔다. 배터리 셀 3사의 수주 잔고는 지난해 말 기준 100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분석된다. 작년 3사의 CAPEX는 약 20조원 가량이다. 이 자금의 약 절반이 관련 장비 기업으로 돌아갔다.
일본 등 외산 장비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와 달리 배터리 장비는 국산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다. 배터리 장비 국산화율은 90% 내외로 파악된다. 국내 장비 업체들은 이미 국내 배터리셀 기업들과 협업으로 기술력을 검증받은 덕에 해외에도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국 견제 정서도 국내 장비 기업들엔 호재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제 국내 장비 기업들도 당분간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전문가들은 셀 기업들의 투자 속도 조절로 인해 국내 장비 기업들도 영향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완성차 기업들이 배터리 생산을 내재화하고 있는 점과 46파이(지름이 46㎜) 원통형 배터리, 전고체 등 차세대 배터리들이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 등은 새로운 기회요인이 될 수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박준서 애널리스트는 "배터리 셀 기업들의 증설 속도가 둔화하면서 장비 기업들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며 "해외 신규 배터리셀 기업이나 완성차 기업들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투자비 절반은 장비…2035년 95조 시장
반도체, 디스플레이와 마찬가지로 배터리도 대규모 장치 산업이기 때문에 시설 투자에서 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단위당 CAPEX는 국내 기준으로 통상 1기가와트시(GWh)당 700억원 수준이다. 해외(북미)는 이보다 많은 1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최근엔 물류비, 인건비 등의 상승으로 CAPEX가 더 상승해 1200~1500억원 수준까지 오르고 있다. 지난 4월 LG에너지솔루션이 착공한 53GWh 규모의 미국 애리조나 공장의 투자금은 7조2000억원이다. 단순 계산했을 때 1GWh당 1358억원의 투자비가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전체 CAPEX에서 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공사 현장마다 차이가 있으나 통상 40~50%로 파악된다. 공장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CAPEX에서 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시장조사 기관이나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는 1GWh당 500억~600억원으로 장비 시장을 추산하고 있다.
장비 투자 금액을 공정별로 살펴보면 전극 공정이 30%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조립 공정이 17%, 화성공정 29%, 기타 24%다.
배터리 기업들은 최근에는 스마트팩토리와 공장자동화에 대한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스마트팩토리란 제품의 기획·설계·생산·유통 등 전 과정을 정보기술(IT)로 통합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향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중의 하나가 로봇을 활용한 공장 자동화다. 배터리나 소재 기업들은 제조 시설 내에 AGV(Automated Guided Vehicle)나 AMR(Autonomous Mobile Robot) 등을 도입해 생산 효율을 높이고 있다.
비록 배터리 기업들이 올해 속도 조절에 나섰다고는 하지만 설비 투자는 계속된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과 달리 삼성SDI는 올해 공격적인 투자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투자 시점이 지연됐을 뿐 장비 시장은 계속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 업체인 SNE리서치는 배터리 장비 시장이 올해 216억달러(약 29조원)에서 2035년 700억달러(약 95조원)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역별로는 2035년 기준 중국이 전체 배터리 장비 시장의 38%를 차지하고 유럽 31%, 미국 28%로 그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했다.
국산화율 90%라는데…韓 장비 기업 어떤 곳 있나
국내 배터리 셀 기업들은 초기에 일본의 장비들을 많이 사용했으나 현재는 국산 장비로 상당 부분 대체됐다. 셀 기업들이 해외 공장을 신·증설할 때도 검증된 국내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배터리 셀 기업들의 국산화율은 90% 내외로 파악된다.
해외 배터리 기업들도 초기에 가격이 저렴한 중국 장비를 많이 검토했으나 수율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한국 장비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조 공정중 가장 난이도가 높으면서도 투자비가 많이 드는 공정이 전극 공정이다. 전극 공정은 양극과 음극 활물질을 각각 알루미늄과 구리 집전체에 도포하는 과정으로 믹싱, 코팅, 건조, 압연(프레싱), 슬리팅, 노칭 공정으로 세분돼 있다. 장비 이름도 믹서(mixer), 코터(coater), 슬리터(slitter) 등으로 불린다. <폼펙터별 제조공정에 대해서는 배터리완전정복 34·35회 참조>
믹서는 다양한 혼합물을 정확한 용량으로 균일하게 섞어서 슬러리를 만드는 것이 기술력이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단위 시간당 더 많은 믹싱 용량을 갖추어야 한다. 최근에는 연속식 믹서로 전환하는 추세다. 믹싱 장비 기업으로는 국내 티에스아이, 윤성에프앤씨(F&C), 제일엠엔에스가 있으며 일본의 이노우에(INOUE), 프라이믹스(Primix), 중국의 리드차이나(선도지능) 등이 있다.
코터는 집전체에 양극 및 음극활물질을 빠르고 균일하게 도포할 수 있는 성능이 요구된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광폭이면서도 분당 70~80m를 코팅할 수 있는 코터가 도입되고 있다. 통상 코팅과 건조 공정은 하나의 장비로 연결돼 있다.
코팅&건조 장비 기업으로는 국내에서 씨아이에스, 피엔티, 한화모멘텀, 하나기술 등이 있다. 중국 기업으로는 선도지능, 잉허과기(잉허커지)가, 일본 기업으로는 도레이(Toray), 히라노테크시드(Hirano Tecseed)가 잘 알려져 있다.
압연기는 롤투롤 장비를 이용해 전극의 두께를 줄여주는 장비로 1.3 마이크로미터(㎛) 이하의 두께로 균일하게 압력을 가해줘야 한다. 국내 기업으로는 씨아이에스와 피엔티가 있다. 일본 기업으로는 도레이, 히타치, 캐논이, 중국 기업으로는 잉허과기, 선도지능 등이 있다.
노칭 장비는 극판의 무지부에서 탭을 붙일 부분만 남기고 잘라내는 기계 장치를 말한다. 종전에는 프레스 방식을 많이 사용했으나 레이저 장비로 전환하고 있다. 관련 국내 장비 기업으로는 필옵틱스(필에너지), 디이엔티, 유일에너테크 등이 있다.
전극 공정에 이은 조립공정은 양극, 음극, 분리막을 셀 형태로 조립해 전지 형태로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와인딩(원통형·각형), 스태킹(파우치형·각형) 등 공정별로 장비가 구분돼 있다. 최근에는 각형에서도 스태킹 방식 채용이 늘어나고 있다. 회사에 따라 노칭 과정을 전극 공정이 아닌 조립 공정으로 분류하는 곳도 있다.
와인딩 및 스태킹 관련 국내 기업으로는 하나기술, 필에너지, 디에이테크놀로지, 엠플러스, 나인테크 등이 있다. LG에너지솔루션에 특화된 라미네이션(lamination) 장비는 나인테크, 디에스케이, 신진엠텍이 공급하고 있다.
전극판을 완성한 후에는 탭을 용접하고 캔이나 파우치 케이스에 넣는 패키징 과정을 거친다. 이와 관련한 국내 기업으로는 엠플러스, 하나기술, 시스템알앤디, 엔에스 등이 있다.
화성공정은 조립이 끝난 배터리 내부에 전해액이 충분히 스며들 수 있도록 일정한 조건에서 보관하는 에이징 과정과, 충방전을 반복하며 배터리에 전기적 특성을 부여하고 전지 성능을 안정화하는 활성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우치형 배터리에는 디개싱 과정이 추가된다.
활성화 장비 기업으로는 원익피앤이, 에이프로, 갑진, 디에이치, 엔에스(디개싱) 등이 있다. 중국 기업으로는 항커가 있다. 검사 장비 기업으로는 엔시스, 브이원텍, 이노메트리, 코윈테크놀로지, 에스에프에이(SFA) 등이 있다.
4680 원통형·전고체 배터리 등장, 장비도 바뀐다
4680, 4695 등 46파이 원통형 배터리 및 전고체 배터리의 상용화를 앞두고 새로운 공정이 도입됨에 따라 장비에도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46파이 배터리에는 현재 습식 전극보다 친환경적이면서도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는 건식 전극이 적용될 전망이다. 건식 전극은 테슬라를 비롯해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등 다수의 배터리셀 기업들이 연구개발(R&D)을 진행하고 있으나 실제 양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전고체 배터리를 양산하기 위해서도 기존과 다른 장비를 도입해야 한다. 국내 최초로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는 삼성SDI는 현재 양산 제조 라인을 갖추기 위해 다양한 장비 업체들과 협상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액체 전해질 대신 고체 전해질을 사용하는 전고체 배터리는 조립 공정에서 전해액을 주입하는 과정이 필요없다. 또한 액체 전해질을 쓰지 않기 때문에 SEI(Solid Electrolyte Interphase) 층을 형성해 전기적 특성을 부여하는 활성화 과정도 단순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신 전극 공정에서 활물질과 고체전해질, 집전체간 결착력을 높이고 계면 특성을 향상할 수 있는 고압의 프레스 과정이 필요하다. 황화물계 고체 전해질의 경우 수분과 접촉하면 유독한 황화수소(H2S) 가스를 발생하기 때문에 전고체 배터리의 제조 공정 관리도 훨씬 까다롭다.
<참고문헌>
미래에셋증권, 배터리장비:실적상향조정. 공정혁신과 OEM 자체 생산에 주목, 2024.3.5
키움증권, 투자 Cycle 본격화:장비주에 주목할 때, 2023.9.13
SNE리서치, 리튬이온 2차전지 제조장비 개발 현황 및 중장기 전망, 2023.5.31
미래에셋증권, 배터리장비:장비없으면 배터리도 없다, 2022.5.23
강희종 기자 mindl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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