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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경와인셀라]스페인 아들의 불가능한 '도전'…클래식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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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페인 '알바로 팔라시오스(Alvaro Palacios)'
1989년 척박한 프리오랏 개척…최고 산지로 거듭나
'레르미타' 세계 최고의 가르나차 와인
비에르소·리오하서 연이은 성공으로 실력 입증

편집자주하늘 아래 같은 와인은 없습니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구식은 모든 세대가 비웃지만 클래식은 인류사와 함께 영속한다(Every generation laughs at the old fashions. But the classic is forever in the human history)."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시대를 초월한 영속성을 지닌 무언가를 두고 우리는 클래식이라고 부른다. 영속성과는 태생적으로 거리가 먼 것이 인간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유한함이 인간을 다른 어떤 존재보다 클래식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알바로 팔라시오스(Alvaro Palacios)도 그랬다. 다만 그저 갈망하기에 머물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투신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그를 클래식이라고 부른다.

스페인 카탈루냐 프리오랏에 위치한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레르미타' 포도밭 전경.

스페인 카탈루냐 프리오랏에 위치한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레르미타' 포도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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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와이너리 아들…프랑스에서 답을 찾다

알바로 팔라시오스는 처음부터 도전하는 쪽을 택했다. 그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와인 명산지 리오하(Rioja)의 와인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더욱 선진화된 산지에서 보고 배우길 원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양조학을 공부한 그는 세계 최고가 와인 중 하나인 페트뤼스를 생산하는 샤또 페트뤼스(Chateau Petrus)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와인 메이커였던 장 피에르 무에(Jean-Pierre Moueix)가 어떻게 클래식 와인을 창조해내는지 곁에서 목격했다.


그는 프랑스에서의 경험이 떼루아(Terroir·포도밭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총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고 말한다. 그들이 섬세하게 떼루아를 분석하고 분류해 와인에 적용하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고급 와인이 가야 할 방향과 방법을 알게 됐고, 다양한 자연의 요소를 자신만의 방식대로 와인에 녹여내고자 하는 열망도 깊어졌다. 마침 스페인 와인에 대한 글로벌 와인 업계의 관심도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알바로도 세상에 특별한 스페인 와인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알바로 팔라시오스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운 스페이스'에서 와이너리와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알바로 팔라시오스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운 스페이스'에서 와이너리와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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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뿌리를 내린 곳은 고향 땅 리오하가 아닌 카탈루냐(Catalunya) 지방의 프리오랏(Priorat)이었다. 스페인 동부의 프리오랏 지역은 지중해로부터 20km가량 떨어진 거친 산악지대로 해발 1000m가 넘는 매우 척박한 땅이다. 프리오랏은 12세기 프랑스 카르투지오 수도회(Carthusian monastery of Escaladei)가 정착해 포도밭을 일궜을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와인산지이지만 알바로가 정착하려던 무렵에는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저렴한 벌크와인을 생산하는 별 볼 일 없는 산지였다.

많이 이들이 고개를 가로젓던 지역이지만, 알바로는 그 땅의 잠재력을 봤다. 그곳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지역에서 자라고 있던 올드바인(수령이 오래된 포도나무)과 '리코레야(Llicorella)'라고 불리는 지역 고유의 편암 토양에서 가능성을 봤다. 알바로는 1900~1940년 사이 심어진 오래된 가르나차 포도밭을 매입했고, 1989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세계 최고의 가르나차 생산자로 우뚝 서다
스페인 카탈루냐 프리오랏에 위치한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레르미타' 포도밭 전경.

스페인 카탈루냐 프리오랏에 위치한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레르미타' 포도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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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 팔라시오스는 오래된 포도밭을 재건하고 밭을 새로이 조성하면서 스페인 토착 품종인 가르나차(Garnacha Tinta)와 카리녜나(Carinena)를 주로 심었다. 프랑스에선 그르나슈(Grenache)로 잘 알려진 가르나차는 가뭄이나 더위에 강한 품종으로 스페인처럼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지만 비교적 발아가 빠르고 늦게 익어 긴 생육 기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완숙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다가 수확하면 진한 과실 풍미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알바로가 특히 빼어난 성과를 일궈낸 것도 가르나차였다. 그는 수령이 오래된 가르나차에서 수확량을 크게 낮춰 개별 열매의 응축미와 복합미를 높이고 장기 숙성력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채택했다. 알바로가 만든 현대적인 스타일의 가르나차 와인은 가르나차가 알코올만 강한 저품질 품종이라는 기존의 평가를 완벽히 깨뜨리고 어떤 품종보다 섬세하고 우아한 고급 품종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프리오랏의 위상 역시 극적으로 변화하며 오늘날 스페인에서 가장 뛰어난 레드와인 산지로 거듭나게 됐다. 이 모든 게 알바로가 프리오랏에 정착한 지 10년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레르미타(L’Ermita)'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레르미타(L’Erm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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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가르나차 생산자 가운데 하나인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와인 중에서도 정수로 꼽히는 와인이 바로 '레르미타(L’Ermita)'다. 산 정상의 작은 예배당을 뜻하는 레르미타는 약 2헥타르(ha)에 불과한 작은 포도밭으로, 인위적으로 모양을 잡지 않고 생겨난 그대로 키우는 오래된 부시바인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다. 레르미타 포도밭은 주로 북향의 가파른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배수가 잘되는 편암 토양으로 이뤄져 있어 화려한 방향성과 함께 우아함과 섬세함을 겸비한 와인을 생산하기에 이상적인 떼루아다.


레르미타는 처음 생산된 1993년 빈티지부터 평론계의 찬사를 받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으로 평가받았다. 유명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은 가장 최근 빈티지 '레르미타 2021' 기준 가르나차 78%, 카리녜나 20%, 기타 화이트 2%가 블렌딩돼 있고, 알코올 도수는 14.5도(%)의 풀바디 와인이다. 구운 빵과 블랙베리, 에스프레소, 감초, 미네랄 등의 향이 심원하며, 타닌의 느낌은 달콤하기까지 하다. 대단한 풍미의 강도를 지녔지만 잘 직조된 매끈한 실크처럼 흠 없이 미려하다.

새로운 도전의 땅, 비에르소
알바로 팔라시오스는 현재 프리오랏(Priorat)과 비에르소(Bierzo), 리오하(Rioja) 등 세 지역에서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알바로 팔라시오스는 현재 프리오랏(Priorat)과 비에르소(Bierzo), 리오하(Rioja) 등 세 지역에서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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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 팔라시오스는 현재 프리오랏을 포함해 비에르소(Bierzo), 리오하까지 세 지역에서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프리오랏에서의 성공으로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인 생산자로 우뚝 선 알바로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데, 그가 주목한 지역은 스페인 북서부의 비에르소였다. 갈리시아와 메세타 센트랄의 경계가 되는 산중에 위치한 비에르소는 온화한 기후와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해풍으로 냉각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스페인에선 가장 선선하고 습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사계절 항시 녹음을 볼 수 있어 건조한 프리오랏과는 상반되는 분위기의 비에르소에 그는 매력을 느꼈다. 특히 로마 시대부터 포도밭이 존재했던 오랜 역사를 지닌 지역인데다 산티아고 순례길 인근에 자리 잡고 있어 종교적 영성이 많이 묻어있는 지역이라는 점도 그를 끌어당겼다. 알바로는 1999년 꼬루욘(Corullon)이라는 산악마을에 밭을 매입하고, 아버지인 호세 팔라시오스의 자손들이란 뜻을 담은 와이너리 '데센디엔테스 데 호세 팔라시오스(Descendientes de J. Palacios)'를 새로 세웠다.


'데센디엔테스 데 호세 팔라시오스(Descendientes de J. Palacios)' 포도밭 전경. 가파른 경사지로 기계 사용이 불가능해 사람과 노새만 이용해 포도를 경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데센디엔테스 데 호세 팔라시오스(Descendientes de J. Palacios)' 포도밭 전경. 가파른 경사지로 기계 사용이 불가능해 사람과 노새만 이용해 포도를 경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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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르소에서 알바로는 멘시아(Mencia) 품종에 집중했다. 가르나차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토착 품종인 멘시아는 천연 산도가 높고 붉은 과일 아로마에 종종 풀내음도 발현해 최근 업계의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 알바로가 만든 멘시아 와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페탈로스(Petalos)'다. 페탈로스는 기본급 와인임에도 60~100년 수령의 올드바인에서 재배한 포도를 사용했는데, 긴 수령을 거치며 나무뿌리가 땅속 깊이 미네랄이 풍부한 편암층까지 뻗어간 덕에 와인에서 풍부한 광물질의 느낌과 좋은 산도를 느낄 수 있다는 평가다.

고향 땅 리오하에서 이룬 혁신

비에르소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즈음 알바로는 예상치 못한 일과 마주한다. 고향 리오하에서 가업을 이끌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며 집안이 운영하던 '팔라시오스 레몬도(Palacios Remondo)'를 그에게 맡긴다. 이미 와이너리에 종사하던 형제들이 있었지만 가업을 이끌 적임자는 알바로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스페인 리오하에 위치한 '팔라시오스 레몬도(Palacios Remondo)' 포도밭 전경.

스페인 리오하에 위치한 '팔라시오스 레몬도(Palacios Remondo)' 포도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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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가 양조 책임을 맡기 전까지 팔라시오스 레몬도는 자체 포도밭 외에도 주변에서 매입한 포도까지 사용해 와인을 만드는 전형적인 스페인 와이너리였다. 하지만 알바로에게는 양보다 질이 중요했다. 아버지가 1960년대부터 조성해둔 100ha의 포도밭의 품질이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고 판단한 그는 다른 생산자들로부터 매입한 포도로 와인 생산하는 일을 중단하고 자체 보유 포도밭에 집중했다. 그는 모든 재배방식을 유기농법으로 전환했고, 단위면적당 소출량을 현격히 낮춰 생산 와인 종류를 절반 이상 줄였다. 일련의 혁신을 통해 생산량은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지만 직소유 포도밭에서 유기농으로 빚어낸 모던한 와인들은 프리오랏에서의 성공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해냈다.


리오하에서도 알바로는 독보적인 가르나차를 생산해내고 있다. 리오하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적포도 품종은 템프라니요(Tempranillo)이지만 알바로는 리오하 동쪽 지역인 리오하 오리엔탈에서 비교적 건조하고 따뜻한 지역의 성격을 온전히 반영해 가르나차 중심의 와인을 만들고 있다. 대표 와인인 '발미라(Quinon de Valmira)'는 해발고도 615m의 포도밭에서 생산한 가르나차 포도로 생산한 와인이다. 입 안에 오래도록 남아 여운을 남기는 질감과 풍부한 미네랄, 약간 높은 알코올 도수로 리오하 지역 와인의 특징을 드러내며, 산도와 원숙미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이다.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발미라(Quinon de Valmira)'

알바로 팔라시오스의 '발미라(Quinon de Valm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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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완결성 넘어 떼루아와 정서적 교감 이뤄야"
스페인 비에르소의 '데센디엔테스 데 호세 팔라시오스(Descendientes de J. Palacios)'의 와이너리 내부 전경.

스페인 비에르소의 '데센디엔테스 데 호세 팔라시오스(Descendientes de J. Palacios)'의 와이너리 내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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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최고의 컬트 와인 중 하나로 꼽히며 언뜻 흠잡을 때 없이 완벽해 보이는 레르미타도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알바로는 레르미타가 한 번의 전환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첫해부터 2005년까지 그는 레르미타에 프랑스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넣었다. 짙은 색상과 확고한 타닌, 이국적인 느낌 등이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떼루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온 어리석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2005년 이후로는 토착 품종만 고집하고 있다.


과거 기술적으로 이미 완벽하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늘 아쉬움이 남았던 건 그의 와인이 지역의 역사 그리고 전통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 땅에 자생하며 깊이 뿌리 내린 나무에서 수확한 열매로 빚어낸 와인을 마실 때 정서적인 충만함과 축복을 느낀다고 강조한다. 그가 기술적 완결성을 넘어 떼루아와 정서적인 교감을 이룰 때 비로소 클래식 와인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다.


"클래식 와인은 단순히 풍미가 뛰어난 와인이 아닙니다. 클래식 와인은 뛰어난 풍미와 더불어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커다란 울림과 감응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지향에 마침내 도달한 와인을 우리는 비로소 클래식 와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스페인 리오하의 '팔라시오스 레몬도(Palacios Remondo)' 숙성고.

스페인 리오하의 '팔라시오스 레몬도(Palacios Remondo)' 숙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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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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