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1000만 시대, 일본을 배우다]⑤
도쿄 도심 한복판에서 찾는 '어르신 놀거리'
턱 없는 거리, 보행기 닮은 카트…배리어프리 환경 조성
"한국인이세요? 엄마 신발 사러 찾아오는 한국인 관광객들 많아요!"
최근 찾은 일본 스가모역 근처 어느 상점가. 도쿄 도시마구에 800m 정도 이어진 이 길에는 양옆으로 상점들이 쭉 늘어서 있다. 눈에 띄는 건 머리가 새하얀 노부부, 보행기를 밀고 다니는 어르신들이다. 상점에서 파는 물품도 요즘 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종류가 아니다. 화과자, 빨간 내복, 한방 약국…. '노인들의 하라주쿠'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스가모 지조도리 상점가'다.
이 자리에서 개업한 지 48년이 됐다는 '알프스 신발가게'의 직원 사토 미치코씨(55)에게 말을 붙였다. 그는 "어르신들이 신기 편하게, 디자인이 단순하고 가벼운 신발 위주로 팔고 있다"며 "쿠션이 들어간 컴포트 신발, 신기 쉬운 캐주얼 신발을 비치해 뒀다"고 설명했다. 군데군데 붙어 있는 홍보물에는 중년 여성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미치코씨는 "어머니 신발을 사가는 한국인 여행객도 자주 봤다"고 말했다.
거리 곳곳에는 어르신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통 있는 가게들이 보였다. 30년 된 기모노 전문점, 1958년 출점한 메리야스 전문점, 80년 전통의 과자가게. 바지 가게 '마쓰미야'에서는 여성 시니어의 체형에 맞는 바지를 제작하는 전문가의 여성 의류를 취급하고 있었다. 바지 가격은 한화로 3만원 정도. 물건을 파는 상점뿐만이 아니다. 이 거리에는 정형외과, 재활클리닉, 한방 물리치료센터 같은 시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노화에 따라 관절에 생기는 만성질환이나 통증을 개선하기 위해 들르는 어르신들이 많아서다.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다 보니 가족과 나들이 겸 찾는 사람도 많다.
이날 거리에서 만난 60대 여성 야마모토 아키코씨도 모처럼 '모녀 타임'을 즐기기 위해 나왔다. 그는 "나이 드신 엄마와 함께 산책 겸 물건을 사러 가끔 온다"며 "몇십 년째 운영하는 가게가 있을 만큼 오래된 곳인데, 올 때마다 젊은이와 관광객이 보여 활기찬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노인 맞춤 백화점·서점도…턱없는 거리부터 보행기 겸 카트까지
도쿄 도심 한복판에 고령자를 위한 공간은 이뿐만이 아니다. 신주쿠역 바로 위에 있는 게이오백화점은 8층을 노인들을 위한 용품 판매 전문 층으로 만들었다. 층 안내판에 '케어용품(Nursing Care Products)'이라고까지 쓰여 있다. 백화점 1층에는 8층으로만 직행하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을 정도다. 8층에 들어서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건 탈모가 진행된 여성들을 위한 가발 전문 매장이다. 안쪽에는 종류가 수십 개에 달하는 보행기, 보청기, 지팡이를 팔고 있어 눈길을 끈다.
도쿄 시내 위치한 대형 서점 '키노쿠니야' 역시 일본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1927년 개업한 이 서점도 한 층을 돌봄·의료 관련 서적으로 채웠다. 인공호흡기 사용법을 알려주는 책부터 노인 구강 관리 도서까지.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한 남성 노인이 건강 관련 서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에 어르신들이 몰리는 이유는 공간 설계 자체가 고령자 친화적이라서다. 약 200개 가게가 모여 있는 스가모 지조도리 상점가는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어르신들을 배려해 보도와 차도 사이의 턱을 없앴고, 차량이 지나다니지 못하게 해놨다. 게이오백화점 매장에는 어르신들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상품명을 크게 프린트해 붙여 뒀으며, 쇼핑 중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의자도 간간이 배치했다.
일본에서는 누구나 사용하는 물품에 디자인만 조금 손봐서 고령자 친화적으로 만드는 방법도 활용하고 있다. 이날 기자는 도쿄 시내의 대형마트에서 눈에 띄는 쇼핑 카트를 발견했다. 우리나라 마트에서 볼 수 있는 높고 큰 카트와는 확연히 다른 디자인이었다. 통상적인 허리 높이가 아닌, 그보다 낮은 위치에 손잡이가 달려 있어 노년층 고객들이 보행 보조 기구처럼 활용할 수 있는 형태였다. 단순한 쇼핑 도구를 넘어 노인들의 안전한 보행을 돕는 지지대 역할까지 겸하는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은 초고령화 사회에 대응하는 일본 유통업계의 혁신과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쿄(일본)=박유진 기자 geni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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