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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중국에서 묘지 예정지에 돼지 뼈 묻은 이유(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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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 속 풍수와 장례 문화 탐구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대원군 아버지 묘
조선 민담에 단골로 등장하는 한 맺힌 원혼
현재 장례가 삼일장으로 일반화된 배경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시리즈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무라야마 지준은 왜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인식했나(中)>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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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장의사에는 풍수를 감정하는 풍수사가 있었다. 새로운 묘나 이장할 묏자리가 바람직하지 않을 때 장소를 옮기는 문제 등을 상담했다. 때때로 폭리를 취하려 해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대지의 길흉을 점치는 풍수에는 크게 양택(산 사람의 거처)과 음택(죽은 사람의 거처)가 있다. 후자는 매장된 선조의 유해(뼈) 상태를 중시한다. 음택풍수에서 흘러온 용맥의 기가 유해를 통해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를 동기감응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묘지는 남향의 양지바른 언덕에 있어야 이상적이라는 통념이 있다. 유해는 시간이 지나면 썩게 마련인데, 배수가 원활하면 깨끗한 뼈만 남아 자손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과거 중국은 묘지 예정지의 지질을 파악하기 위해 미리 돼지 뼈를 묻어 두고 변하는 상태를 조사했다. 매장된 뼈가 황색이면 선호했고, 흑색이면 피했다. 적잖은 자손들은 음택풍수 은혜를 갈망한 나머지 편안하게 묻혀 있는 부모 묘를 파내어 뼈의 색깔을 확인하고는 했다. 불효막심한 일이 끊이지 않자 나라에서는 법으로 묘 발굴을 금지했다. 조선에도 이와 비슷한 규정이 있었다.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선의 풍수'에 따르면 험악한 바위산 위용의 관악산은 오행으로 따지면 불에 해당하는 악산이다. 그 때문에 경복궁을 포함한 서울 시내에 화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한 주술로 물항아리를 남산 산중에 묻고 해태상을 광화문에 배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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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적으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화교와 유대인이 운영하는 중국 상하이 빌딩이다.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했다. 지상 47층, 지하 4층의 초 근대적 빌딩이다. 벽면 등 내부에 다양한 풍수·주술적 장치가 설치됐다. 설계에는 홍콩의 풍수사 고백령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설계 단계에서 풍수가 고려된 경우는 한국에도 여럿 있다. 가장 유명한 건물은 독립기념관이다. 일본에서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전두환 정부에서 주도해 건립했다.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흑성산 기슭. 예부터 오룡쟁주지지(五龍爭珠之勢·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지세)로 알려진 명당자리다. 고려 태조 왕건이 930년 8월 천하 통치의 소원을 빌며 설치한 천안 도독부도 이 땅에 있었다.


*대원군은 젊은 시절부터 풍수서에 심취해 전국에 있는 명당을 찾아다녔다. 그는 어느 지관이 일러준 명당자리(가야산 기슭)에 아버지 남연군을 모셨다. 좋은 땅의 영험한 기운 덕인지 묘를 이장하고 13년 뒤 아들 고종이 즉위했다. 사실 이곳은 효험보다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도굴 사건으로 더 유명해졌다. 1868년 4월 인근 해안에 상륙한 외국인 한 무리가 남연군 묘를 파헤쳐 묘곽에 도달했다. 그러나 밀물 시기를 놓칠까 염려해 관까지 손을 대지 못하고 철수했다. 도굴을 주도한 인물은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였다. 사건이 있기 2년 전 경기만 일대에서 조선에 통상 교섭을 요구했다가 실패해 이런 일을 벌였다. 훗날 남긴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에 따르면 그는 대원군이 도참 신봉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내한 조선인이 남연군 묘에 새겨진 비록을 입수하면 수도 서울을 장악한 것과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부추겨 도굴을 단행했다. 대원군을 압박해 통상을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소식을 전해 들은 대원군은 몹시 노해 더 강력한 양이 정책을 취했다고 한다.


*풍수의 기본은 물의 흐름이다. 산의 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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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풍수사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묘지다. 새로운 묘나 이장할 묏자리가 바람직하지 않은지 살피고 장소 이전 등을 상담한다. 대부분 장의사와 함께 일한다. 둘째는 학계다. 한문학이나 동양 철학을 전공한 학자, 교수 등이 주를 이룬다. 셋째는 전업(轉業)이다. 바른 풍수, 즉 왜곡되지 않은 풍수를 찾으려고 풍수사를 만나거나, 관련 역사를 연구하다 심취해 직업을 바꾼다. '한국의 풍수 사상' 저자인 최창조 교수가 대표적 예로 손꼽힌다. 풍수 연구에 전념하고자 서울대 교수 직위를 버린 일화로 유명하다. 넷째는 도시 계획과 건축이다. 대부분 환경론적으로 풍수를 고려한다.


*풍수지리의 발생지는 고대 중국으로 전해진다. 북쪽 일대는 한랭한 북풍으로 자주 공포에 휩싸였다. 남쪽 일대는 비를 머금고 오는 남풍으로 하천이 곧잘 범람했다. 자연재해를 막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풍수는 바람과 물의 화를 피할 땅을 선별하는 방법으로 자주 이용됐다. 거처를 안정시키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잣대로 출발한 셈이다.


*장서각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기맥을 누르기 위해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 옆의 자경전을 부수고 일본 건축 양식인 천수각을 모방해 건립됐다고 전해진다. 박물관과 서고로 사용됐다. 풍수지리적으로 좌청룡에 위치해 건축할 때부터 조선 왕조의 기맥을 끊기 위한 흉계라는 여론이 있었다. 이미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조선 왕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제는 창경궁에 동물원도 지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해 격하시키고 우백호에 해당하는 남쪽 언덕 위에 식물 표본관을 세워 정전을 보호하는 청룡과 백호를 눌렀다고 전해진다.


*조선 왕조는 국가 통치 이념을 유교로 정하고 모든 신앙과 의례를 이에 맞게 정비했다.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관장한 제사가 대표적인 예. 민간에서도 '주자가례'에 따라 사당을 세우고, 보편적 의례로 조상 제사만 지냈다. 조선은 그 밖의 허가받지 않은 신앙이나 의례를 음사로 규정하고 강력히 규제했다. 그런데 불교와 달리 유교는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절대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교에는 신에 의지하는 자기구복 체제나 사후 내세 신앙이 부재하다.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기양(복은 오고 재앙은 물러가라고 빎) 체계 또한 없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조상 신앙은 절대 신격을 대신했고, 산악신앙과 결합한 풍수지리는 자기구복 체계의 허점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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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성들은 조상에 대한 효 사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려고, 다시 말해 좋은 묏자리를 찾으려고 풍수 사상을 받아들였다. 유교에서 결핍된 종교적 욕구를 전통 신앙을 끌어들여 메웠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신앙의 목표에는 현세적 열망이 강렬하게 작용했다. "누구는 묘를 잘 써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누구누구는 묘를 잘못 써 패가망신했다"라는 내용의 풍수 설화가 난무했다. 국가가 백성들의 의례를 통제함으로써 영적 세계를 지배하고 유교적 사회 질서를 확립하려 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를 봤다고 할 수 있겠다.


*불교는 조선 전기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묘지 풍수신앙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사정은 다르다. 풍수신앙이 극성을 부려 산송(山訟·묘지를 쓴 일로 생기는 송사)이 빈발했다.


*풍수지리는 고려는 물론 조선 사회에서도 전문 기술직으로 대우받았다.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에 음양과(陰陽科)가 있었을 정도다. 중인 계층을 대상으로 진행된 잡과 시험이 그것. 음양과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관상감의 주관 아래 천문학과 과학 그리고 지리학을 시험했다. 지리학의 경우 3년마다 보는 식년시 초시(1차 시험)에서 네 명을 선출한 다음 복시(2차 시험)에서 두 명을 뽑았다. 해당 관리들은 궁궐과 왕릉의 선정과 이전 등에 관한 실무를 담당했다. 흔히 풍수가를 지칭하는 '지관'은 바로 이들에게서 유래한 말이다.


*조선 후기에는 풍수 사상의 영향으로 남의 산에 몰래 암장하거나 권력과 금력을 앞세워 강제로 묘를 쓰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자신들의 묘지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자구 행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산송도 흔히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산송'이라는 말은 현종 5년(1664) 사간원 보고에 처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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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적잖은 서민들은 왕릉에서 100보 이내나 한성의 금장 구역인 성저십리에 묘를 썼다. 일부는 국가에서 법률로 금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투장이 많이 벌어졌다. 투장이란 산지 소유자 몰래 묘를 쓰거나 타인의 묘지를 교활하게 침탈하는 행위다. 예컨대 명당 길혈을 정하고 흰 옹기에 '아무개가 아무 날 이곳을 점하였다'라는 글을 적어 땅속에 묻었다가, 이것을 파내어 이 땅이 자기 소유였다고 주장했다. 이를 매표점산이라 한다. 기존 분묘 구역 안에 몰래 매장하는 압장과 암장 뒤 봉토하지 않고 평지인 것처럼 위장하는 평장, 금장 지역에 암장한 뒤 실제 분묘에는 허수아비 등을 묻는 공장 등도 투장에 해당한다.


*늑장은 권세를 이용해 땅 주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점탈하는 행위를 뜻한다. 주로 사대부와 관리들이 행했다. 조선 후기에는 많은 부를 축적한 서민 재력가(주로 관청과 결탁한 상인)들도 점탈에 합류했다.


*자구 행동은 묘지 침탈에 물리적으로 대항한 움직임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산송(묘지를 쓴 일로 생기는 송사)을 빙자해 사대부를 구타하고 오물을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투입한 죄, 무력으로 매장을 막은 죄, 부녀자들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가 매장을 방해한 죄, 몰래 매장하려는 사람들을 두들겨 쫓고 널을 범한 죄, 묘를 파고 광중을 뚫고 널에 방화한 죄, 헛무덤을 만들어놓고 참 무덤이라고 속인 죄 등이 있다. 이러한 자구 행동은 자신들의 권리 침해를 법이 아닌 스스로 힘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일부는 관청의 허락 없이 다른 이의 무덤을 파헤치고 널을 부수기까지 했다. 당연히 유교를 신봉하던 조선 왕조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모두 묘지 범죄로 다뤘다.


*조선 사회에 부계 중심의 종족 질서가 형성된 건 15~16세기다. 같은 부계 친족 분묘가 모인 족분도 그 무렵 확대됐다. 왜란과 호란의 전쟁 통에 잃어버린 윗대 조상 분묘를 찾아내 이장하고, 족분을 정비하는 위선 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사족(문벌이 좋은 집안)의 묘지에 대한 높은 관심은 풍수지리설과 결합해 조상을 명당에 모시려는 욕구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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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송이 격화한 배경에는 당시의 역동적인 사회 변화상이 압축돼 있다. 당시 사회는 상업의 발달로 양반 수가 증가하고 노비가 감소하는 등 신분 질서가 와해하고 있었다. 양민들 사이에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는 욕구가 높아지는 등 명당에 대한 욕구가 증대했다.


*조선 사회 유교는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민담이나 전설을 많이 생산했다. 그런데 유교에는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 불교의 '극락과 연옥'과 같은 내세사상이 없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죽은 다음 좋은 곳으로 간다는 이야기보다 악인들이 현세에서 벌을 받는 쪽으로 이야기가 더 많았다. 한 맺힌 원혼과 무덤이 단골로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적인 방식의 화장은 대한제국 끝 무렵에 일본인들이 들여왔다. 건물 안에 설치한 화장로에서 화장을 진행했다. 수백 년 동안 유교적인 의식에 젖어 있던 우리 민족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까지 더해져 '왜놈들의 장법' 또는 '악상(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에나 이용하는 나쁜 장법'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퍼졌다.


*조선총독부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을 제정해 공포했다. 이에 따라 공동묘지 제도를 도입해 누구나 공동묘지에만 매장하도록 강압했다. 하지만 뿌리 깊은 가족이나 문중 묘지 전통은 일제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는지 슬그머니 후퇴해버리고 말았다. 이미 마련된 공동묘지는 조선 반도에 나와 있던 일본인들과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서민들이 어쩔 수 없이 이용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선진적인 제도의 도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누구나 똑같이 공동묘지를 사용하게 한 것 자체를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전국에 산재한 무덤의 폐단을 줄인다는 명분을 앞세워 조선을 수탈하는 데 장애가 되는 묘지들을 규제하려 한 행위는 심각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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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건전한 장례'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 풍습을 대폭 간소화시킨 '의례준칙'이라는 것을 제정하고 강제해 나갔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 대한제국 정부에서 화장을 해금(解禁·금지하던 것을 풀다)했다는 공식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1912년 이른바 '취체규칙'이라는 것이 공포되기 전에는 화장이 완전하게 부활했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앞서 조선은 성종이 국법으로 화장을 금지했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화장장이 처음으로 설치된 날은 1902년 5월 10일이다. 노천 화장터에서 장작으로 불을 때던 고전적인 화장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에는 사람이 죽은 다음 24시간 이내에 매장 또는 화장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강제적인 시간제한 규정은 고려 시대에 사흘 이내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장례가 삼일장으로 일반화된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묘지 '취체규칙'을 시행했다가 큰 분쟁이 일어나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조선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묘지로 인한 다툼이나 범죄는 표면상 현저히 감소했으나 암장 등은 여전히 성행했다. 유림을 비롯한 많은 문중도 조선인 고유의 풍속과 관습을 무시했다며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결국 식민 당국은 민정(조선 사람들의 정서)과 관습의 실정에 맞춰 '취체규칙'을 개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조선총독부가 그 무렵 3·1운동이라는 조선 인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문화 정치라는 명분을 내걸고 회유책의 하나로 개정안을 내놓았다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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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등 계속되는 사회 혼란과 그 뒤 급속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장묘 정책을 다룰 만한 여력이 없었다. 가장 고민이 심했던 시기는 1960년대 초다. 높은 유아 사망률과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적잖게 사망하면서 서울의 화장률이 50%에 육박했다. 열악한 화장장 시설에 제대로 된 납골당마저 없어 화장과 관련 시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졌다. 도시 안이나 가까운 곳에 있던 화장장과 공동묘지를 '도시 부적격 시설'이라고 낙인찍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 재단법인의 공원묘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성됐다. 장례예식장은 1973년 제정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에 의해 등장했다. 상당한 변화에도 묘제와 유교식 장례라는 본질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부터 묘지를 구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화장이 증가하면서 납골 문화라는 다소 이질적인 문화 요소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1961년 군사쿠데타 정부에 의해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 장례와 관련한 법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법안 작성에 참여한 위원들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나 한국에서 일본식 법률을 교육받고 실무에 종사하던 법 실무 또는 법학자였다. 그래서일까.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은 제목과 용어의 정의는 물론 본문까지 당시 일본 법률과 거의 일치한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전후 일본 법률을 그대로 베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우리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담아야 할 풍속에 관한 법률을 우리를 지배했던 나라에서 들여온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장례문화는 적어도 용어만큼은 또다시 일본 색을 강하게 띠게 됐다.


*장례식장은 1990년대 '전문 장례식장 육성 방침'에 따라 전국 곳곳에 조성됐다. 그 무렵 정부는 병원 부설 장례식장에 대한 시설개선자금 융자 지원제도도 시행했다. 이에 따라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한 장례 산업은 꽃을 피웠지만, 동네 장의사들은 줄지어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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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박전열 외 지음·발행처 한누리미디어 '그 생성원리와 문화산업적 기능 일본의 요괴 문화(2005)', 김용의 지음·발행처 전남대학교출판부 '일본설화의 민속세계(2013)', 모로 미야 지음·김경아 번역·발행처 일빛 '전설일본(2010)', 천인호 지음·발행처 세종출판사 '풍수사상의 이해(1999)', 노자키 미츠히코 지음·발행처 동도원 '한국의 풍수사들(2000)', 이석정 박채양 최주대 지음·발행처 브레인북스 '조상을 잘 모셔야 자손이 번성한다(2007)', 손숙희 지음·발행처 국학자료원 '보통 사람이 쓴 무속이야기(1997)', 홍태한 지음·발행처 민속원 '우리 무당굿의 세계(2009)', 김희영 지음·발행처 민속원 '풍속 조사 자료를 통해 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 인식(2014)', 무라야마 지준 지음·최순애 요시무라 미카 번역·발행처 신아출판사 '조선인의 생로병사 1920-1930년대(2014)', 무라야마 지준 지음·최석영 번역·발행처 민속원 '한국근대민속인류학대계 2: 조선의 풍수(2008)', 이와타 시게노리 지음·조규헌 번역·발행처 소화 '일본 장례문화의 탄생(2009)', 장윤선 지음·발행처 이숲 '조선의 선비 귀신과 통하다(2008)', 박태호 지음·발행처 서해문집 '장례의 역사(2006)', 유재철 지음·발행처 김영사 '대통령의 염장이(2022)', 김영민 지음·발행처 새문사 '우리 조상신앙 바로알기(2005)'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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