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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모금]6월항쟁 현장서 낭만적 부러움 느낀 미국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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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독법'과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의 저자 로버트 파우저는 미국 앤아버 출신인데, 1983년 부산을 시작으로 한국과 오랜 연을 맺었다. 2014년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거주했고 서울대, 고려대, 한국과학기술대(카이스트), 일본 리쓰메이칸대, 교토대, 구마모토가쿠엔대, 가고시마대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한국에서 거주한 기간은 모두 합쳐 13년이고 서울에서만 11년 반을 살았다.


1987년 6월에는 남대문시장 골목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셨다. 당시 비슷한 또래 한국 젊은이들의 역사적인 투쟁 모습을 보며 낭만적인 부러움을 느꼈다. 대전에서도 1년 반을 살았고 인천, 전주, 대구도 틈날 때마다 찾았다.

일본에서는 교토, 구마모토, 가고시마 등에서 거주했다. 뉴욕과 영국 런던을 자주 다녀왔고,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는 유학 생활을 했다.


'도시독법'은 오랜 시간 세계 여러 도시를 체험한 저자의 도시 탐구기다. 서울, 부산, 대전, 전주, 대구, 인천을 비롯해 일본의 구마모토, 가고시마, 교토, 아일랜드 더블린, 영국 런던, 미국 뉴욕과 라스베이거스 등 16개 도시에서 보고 느낀 생각을 담았다. 도시는 누구나 꿈꾸는 화려하고 멋진 삶의 대상이지만 한편으로 피곤하고 복잡한 일상의 상징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바르게 인식하고 어떻게 해야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 수 있는지 같이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에서는 왜 도시가 특정 역사적 경관을 보존하려 하는지 그 배경과 의미를 살핀다. 저자는 건축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오래된 도시를 잘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경관 보존은 선이며 반면 개발은 사회적 공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 북촌의 집값 상승을 보면서 역사적 경관 보존의 결과로 되레 시민들은 소외되고 있다는 고민도 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도시들이 어떠한 이유로 특정 역사적 경관들을 보존하고 있는지 그 의미와 가치를 탐구했다. 이탈리아 로마와 일본 교토의 역사적 경관들이 종교 때문에 보존됐으며 일본 히로시마와 독일 드레스덴은 전쟁의 아픈 역사 때문에 오늘날의 평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고 설명한다.

[책 한 모금]6월항쟁 현장서 낭만적 부러움 느낀 미국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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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서울은 곧 강북이며, 사대문 안의 몇몇 장소다. 강남은 '뉴서울'이며 여의도와 영등포는 위성도시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고, 지금도 1년에 몇 달씩 서울에 가 있곤 하지만 어쩌다 강남에 가게 되면 '서울' 같지 않아 이질감이 느껴지고 여의도는 매우 인공적인 계획도시 같아 사람 냄새를 느낄 수가 없으며 서울대 인근은 마치 경기도 공장 지대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131쪽, 서울: 어느덧 코즈모폴리턴, 새 시대의 주인공 또는 고립과 쇠퇴의 갈림길)

1999년 한국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가까운 친구 집으로 놀러 갔는데, 친구가 케이블 모뎀을 자기 집에 설치했다고 자랑을 했다. 일본에서 케이블 모뎀을 개발 중이라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그것이 벌써 한국의 일반 가정집에 보급되어 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는 미심쩍어하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내 앞에서 바로 컴퓨터를 켜고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을 해 보였다. (중략) 당시는 한국이 IMF로 어려운 상황을 겪은 직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선진국인 일본을 여러모로 열심히 쫓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강했고, 그런 인식은 나만 가지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런 나로서는 한국에서 일본보다 앞서는 분야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147쪽, 서울: 어느덧 코즈모폴리턴, 새 시대의 주인공 또는 고립과 쇠퇴의 갈림길)


2016년 말, 나는 미국에서 TV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대한민국의 촛불을 보았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196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흑인 인권을 위한 대규모 시위를 떠올렸다. 나라와 시대가 다르지만 한국과 미국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끄러운 나라'라는 사실이다.(155쪽, 서울: 어느덧 코즈모폴리턴, 새 시대의 주인공 또는 고립과 쇠퇴의 갈림길)


1987년 2월부터 1988년 8월까지 약 1년 반 정도 대전에 살면서 한국과학기술대학에서 교양 영어를 가르쳤다. (중략) 대전으로 내려간 뒤 처음 살았던 곳은 대덕연구단지 안에 있는 교수 아파트였다. (중략) 처음으로 시내에 나가 들른 곳이 문경서적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 자주 다니던 종로서적만큼 큰 규모의 책방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영어 원서가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의 영어 원서가 꽂힌 걸 보고 솔직히 놀랍다고 생각했다. 지역의 도시에서 과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책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의아했다. 이후로 문경서적의 단골이 되었다.(164~165쪽, 대전: 도시의 복판에서 지역 원도심의 현재를 마주하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터질 게 터지고야 말았다. (중략) 경찰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을 피해 남대문시장 안 골목길로 돌고 돌아 겨우 서울역에 도착, 대전행 기차를 탔다. 최루탄 때문에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렀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시위 현장에는 최루탄과 경찰의 폭력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지 어렴풋하지만 짐작하고 있었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 존경심이 차올랐고, 순간적이긴 했으나 나도 언젠가 미국의 문제를 바꿔내는 역사적인 투쟁의 현장에 서고 싶다는 낭만적인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중략) 6·29 선언 소식을 들은 건 파리에서였다.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한국 시민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다시 깊어졌고, 이 역사적인 순간에 한국을 떠나 있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했다.(164~168쪽, 대전: 도시의 복판에서 지역 원도심의 현재를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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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교회와 정치의 복잡한 상관관계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318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베레강 건너에 성베드로대성당을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그때만 해도 가톨릭 교회는 세가 약했다. 게다가 로마와는 매우 복잡한 관계이기도 했다. 즉, 로마제국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장본인이었다. 나아가 기독교 신자들을 오랜 시간 핍박하고 억압해온 역사로 인해 가톨릭 교회로서는 로마제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교회 역시 권위가 필요했다. 로마라는 도시의 상징성은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었다. 또한 로마가 적대적인 세력으로 넘어가면 교회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었으니 로마의 안위에 힘을 보태야 했다.(37쪽, 종교 유산을 적극적으로 보존했던 '그들'의 속사정_로마·교토)


일본은 중세 이후 성을 중심으로 한 마을이 많이 생겼는데 이를 두고 성 밑 마을이라고 했다. 일본어로는 성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조카마치'로 지칭한다. 히로시마는 강이 많고 독특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 성을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성 밑 마을로 발달했다. (중략) 1590년대 지은 히로시마 성은 오랫동안 히로시마 번 권력의 중심이었다. (중략) 히로시마 성은 이런 곡절 많은 시대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불에 타거나 훼손되지 않았다. (중략) 1868년 불태운 오사카성은 1931년 콘크리트로 다시 지었고,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던 히로시마 성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1931년 국보로 지정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까지 연합군의 일본 침략에 대비하는 군 시설로 쓰던 히로시마 성은 원자폭탄에 맞아 한순간에 불타 사라졌다. (중략) 히로시마의 복구 사업은 다른 곳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희생자를 애도하고 이를 기념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중략) 이런 연유로 콘크리트로 짓긴 했지만, 비교적 꼼꼼하게 복원한 히로시마 성은 히로시마부흥대박람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었고, 그 내부에 향토역사전시관을 설치함으로써 역사적인 의미도 부여받았다. (중략) 히로시마가 '평화의 도시'가 된 것은 1947년 첫 민선 시장이었던 하마이 신조(1905~1968)의 노력 덕분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하마이는 히로시마시의 공무원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공무원들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지만 하마이는 비교적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그는 육군과 함께 구조 활동에 나섰고, 그 직후 부사장으로 임명되더니 1947년 첫 선거에 출마,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시장이 된 그는 1947년 8월6일 희생자를 애도하는 행사에서 최초로 평화를 선언하는 연설을 했고, 그 뒤로 매년 치르는 이 행사에서는 히로시마 시장의 '평화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197~206쪽, 전쟁의 상처를 평화의 상징으로 남겨두다_히로시마·드레스덴)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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