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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도 731부대 '껍질 벗긴 통나무'였다(上)[알고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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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경성 크리처' 모티브는 731부대
인체실험 만행, 의학자들 조직범죄 면면 부각
이시이, 교토대학 총장 딸과 결혼해 기반 마련
감염, 갈증, 고압전류, 청산 화합물 등 이용
731부대 최소 3000명 잡아두고 실험 강행

일본은 중국 하얼빈 근교에서 731부대를 운영했다. 국제법에 반하는 세균전과 독가스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마루타'로 불린 3000여 명을 인체실험과 생체해부로 죽였다. 범죄를 주도한 이들은 당시 대학 의학부 등에 소속된 의학자와 의사들. 대다수가 전후 미국의 실험 결과 은폐와 면책 거래로 아무런 처벌 없이 의학계와 의료계 요직에 복귀했다.


조선인도 731부대 '껍질 벗긴 통나무'였다(上)[알고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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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각종 매체에서는 전쟁의 공포를 강조할 목적으로 특별한 집단의 광기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왜 그런 기미에 이르게 됐는진 가리키지 않는다. 전쟁이 그들을 바꾼 게 아니라 그들이 전쟁을 이용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경성 크리처'는 그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인체실험을 주도하는 가토(최영준)가 윤채옥(한소희)에게 나진을 활용한 인체실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수한 과학자로서 호기심과 열정, 내 피조물에 대한 애착. 뭐, 그런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 그는 실험 대상으로 국적, 신분도 가리지 않는다. 옹성병원을 후원한 일본 귀족 부인 마에다 유키코(수현)가 화상을 입고 괴로워하자 나진을 건네며 권유한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교토로 돌아갈 건지, 아니면 계속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지 말입니다."

요시카이 나쓰코와 유아사 겐이 공동 저술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1981)'에 따르면 1940년대 전반 의학생 다수는 중국에 가면 인체실험을 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부는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731부대를 수십 년간 추적해온 쓰네이시 게이이치 나가사키대학 조교수는 저서 '의학자들의 조직범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시이 시로가 운영한 기관에서 인체실험을 한 이들은 자신들이 한 연구를 토대로 논문으로 발표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인체실험의 결과임이 명백한 논문을 발표하거나 부대에서의 추억을 의학잡지에 투고했다. 그것은 학계 등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져 게재됐다. 이시이 기관의 인체실험이 일본 의학계에서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임을 보여준다."


'경성 크리처'에서 인체실험은 비밀리에 진행된다. 군인들에게 함구를 교육하고, 도망치는 사람을 끝까지 쫓아 죽인다. 731부대의 진실이 오랫동안 감춰진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의학계 스스로가 폭로하고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인체실험이 비상식임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 둔감함은 강하게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반대로 비상식적임을 인지하고 숨겼다면 내부자들끼리만 인체실험을 공유하는 의학자와 의사들의 특권의식, 그리고 자신들을 권위자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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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기요노 겐지는 이시이 시로의 스승이다. 병리학도 대부분을 이시이의 부대로 보내고 거액의 고문료를 챙겼다. 평소 이시이와 그의 거대 연구시설을 높게 평가했다.


*기요노는 틈틈이 책을 수집하고 고전을 필사했다. 필사된 고전은 만엽집(일본 시가집)과 풍토기(나라 말기 각 지방의 지명 유래, 지세, 산물, 전설 등을 적어 조정에 올린 기록)부터 중국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필사를 마치면 제본해 친분이 있는 대가에게 휘호를 부탁했다. 그는 교토의 사원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경전을 열람했다. 그런데 1938년 6월 30일 그는 진고사 측 신고로 형사 심문을 받았다. 실제로 가방 안에선 경전 수십 점이 나왔다. 수사는 교실과 자택으로 확대됐다. 교토 시내에 있는 절 스물두 곳에서 훔친 경전 630권이 발견됐다. 교수실에서도 무려 1360점에 달하는 무단 대출 도서가 나와 압수됐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압수된 물건 중에는 이미 표구(그림 뒷면이나 테두리에 종이 또는 천을 발라서 꾸밈)돼 어느 사원 소유인지 알 수 없는 책도 있었다. 기요노는 즉각 휴직 처분을 받아 7월 10일 교토 형무소에 수감됐고 6개월간 묶인 신세가 됐다.


*이 사건으로 친구였던 하마다 고사쿠 교토대학 총장은 차기 총장 후보직에서 사퇴했고, 일본 문부과학성은 총장 선거를 중지시켰다. 하마다는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려 일주일 뒤 급사했다. 기요노는 이듬해 교실을 떠났으며, 이시이 부대로 보낸 제자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그 뒤 731부대와 대학과의 관계, 그리고 기술적 지도는 이시이, 마스다 도모사다, 나이토 료이치 군의와 기무라 렌 미생물학 교수가 맡았다고 전해진다. 이시이는 전후 기요노의 장례식장에서 그와의 재회를 회고했다. "기요노 선생님은 어떤 질문에도 그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또한 지금은 이를 잘 정리해서 국가에 봉납하고 마지막 일본의 방어, 파멸의 방어, 끊임없는 발전 그리고 재건을 위해 써야 한다며, 멀리 이바라키현에서 오셔서 제집에 머물며 내내 걱정하셨습니다."


*기요노는 교수직을 내려놓은 뒤 도쿄에서 태평양협회(1938년 5월 설립돼 1945년 8월 해산한 일본의 국책 조사기관) 촉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우량 민족을 열등 민족과 혼재시켜 함께 번영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 추진을 외쳤다. "우량 민족 보호와 함께 그 인구를 증가시켜 개발을 촉진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의 우열성은 뼈 계측 등 인류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민족마다 잘하고 못하는 분야가 있기에 서로 보충하는 것이 바로 대공아공영권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전쟁 중에나 패전 뒤에나 일본 국민은 대체로 전쟁이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으며 견뎠다. 그러나 그런 국민마저도 수많은 포로를 인체실험에 이용하고, 종전 시 404명을 독가스로 말살한 것도 모자라 시신을 소각하고 시설을 폭파해 증거를 인멸한 이시이 부대의 존재에 대해선 큰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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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는 1920년 교토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근위보병연대 중좌가 됐다. 그는 1924년 교토대학 미생물학 교실에 대학원생으로 들어갔다. 당시 가가와현에서 맹위를 떨치던 기면성 뇌염에 관한 조사를 제안해 학부교수회의 관심을 끌었다. 실제 진행된 조사에서 이시이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훗날 그는 기요노의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학원생 시절, 교토대학에서 기면병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다른 대학들은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데 교토대학만 잠자고 있다. 이대로라면 교토대학은 뒤떨어진 대학이 돼버린다. 이번 기회에 분발해서 기면병의 실체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기요노 선생님은 무릎을 치며 찬성해주셨습니다. 곧 가가와현 마루가메에 본거지를 둔 커다란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 가가와현 니호군으로 본거지를 옮겨 자료와 묘지에 있는 시체까지 모아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세균반과 바이러스반으로 나누고 와타나베 헨(훗날 731부대 기사가 됨)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원인균을 찾기 위해 샹베를랑 여과기로 걸러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마침내 동물실험까지 성공해 도쿄에서 열린 학회에서 발표하게 됐는데, 많은 반박을 받긴 했지만 끝내 바이러스였다는 사실이 인정되면서, 닛신이카쿠에서 별쇄본이 나온 것은 여기 계신 모든 분이 알고 계실 겁니다."


*이시이는 1924년 8월 교토에서 출발해 마루가메 위수병원에 본거지를 두고 이듬해 3월까지 조사했다. 원숭이 스물일곱 마리와 토끼 마흔 마리, 모르모트와 쥐 같은 설치류 등을 실험에 이용했다. 후두부에 주사하는 이른바 야마오카법이나 각막 내 접종으로 검체의 병원성을 관찰했다. 이 조사는 훗날 이시이가 731부대를 조직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새로운 조직 결성의 집념을 불태우는 계기가 됐으며 원숭이를 이용해 감염 원리에 관한 생체실험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는 묘지에서 시체를 파내 병변과 검체 조사를 체험하며 감염증의 원인을 밝혀내는 데 병리해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과도한 예산을 사용하면서 돈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믿음도 가졌다. 이시이는 아라키 도라사부로 총장으로부터 사업예산을 따내는 과정에서 그의 딸 기요코에게 반해 결혼에 성공함으로써 사회적 신뢰와 활동 기반도 얻었다.


*이시이는 가가와현에서 뇌염 조사를 마치고 대학원을 수료했다. 뇌염 연구로 의학 박사 학위를 딴 그는 잠시 교토 위수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28년 병리학 교수가 된 기요노의 권유에 따라 자비로 해외 정세를 조사하러 여행을 떠났다. 싱가포르, 실론(스리랑카), 이집트,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등 스물다섯 나라를 찾았다. 관련한 수기나 보고를 남기지 않았으나 각 나라의 세균전 준비상황을 파악했다고 전해진다. 이시이는 딱 한 번 기요노의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왔을 때 한참 고민해봤는데, 일본이 아직 손대지 못하고 있는 커다란 결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국내에선 일본이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청일전쟁·러일전쟁·일독전쟁·제남 사건·시베리아 출병 같은 사변을 통해 쑥쑥 성장해온 만큼 우리가 1등 국가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세계 속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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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는 귀국 뒤 "일본 국방에는 결함이 있다. 국제적으로 금지된 세균전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학계의 온갖 권력을 총동원해 어떻게든 세균전 연구를 실현하고자 했다. 개인적 발상을 최고학부의 권위를 빌려 강행하려고 했다. 결국 군의학교 고이즈미 교관의 협력을 얻어 1932년 8월 군의학교 내에 군의 다섯 명이 배속된 방역연구실을 개설했다. 이 연구실은 이듬해 8월 군의 일곱 명, 요원 서른다섯 명의 거대 집단으로 성장했다. 업무에 관한 모든 권한은 주임인 이시이에게 주어졌다.


*이시이는 마스다 도모사다 군의 대좌와 함께 군의학교 방역연구실 설립 직후부터 만주로 출장을 떠났고, 하얼빈에서 남동쪽으로 약 70㎞에 펼쳐진 베이인허를 새로운 연구 시설 부지로 점찍었다. 1933년 민가를 퇴거시켜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도고 다로'라는 가명으로 극비 세균 연구집단인 '도고부대(가모부대)'를 조직했다. 설립 당시부터 포로를 사용해 탄저균 접종 등의 인체실험을 강행했다. 도고부대는 포로수용소가 아니었지만, 이시이는 만주사변(1931) 뒤 체포된 포로와 정치범을 '특이급(특별 이송 취급)'이란 이름으로 상황에 따라 인체실험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체계를 확립했다. 1938년 도고부대를 시찰한 참모본부의 엔도 사부로 중좌는 피험자를 우리에 가두고 세균을 생체에 투여한 뒤 병세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고 전후 잔혹한 연구 실태에 대해 진술한 바 있다. 당시 부대원이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체실험은 감염에만 그치지 않았다. 기아 상태로 물만 줬을 때 사람이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 관찰하는 실험도 했다. 고압 전류로 감전시키면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청산 화합물을 이용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등도 실험했다. 약 200명에 가까운 포로가 동원됐다고 추정된다.


*1935~1936년 도고부대에서 근무한 구리하라 요시오는 물만 먹고 얼마나 견디는지 알아본 실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군속 스기와라 사토시 밑에서 물만 먹고 며칠 동안 사는가를 실험했다. 그 결과 보통 물로는 45일, 증류수로는 33일을 살았다. 증류수만 먹은 사람은 죽음이 가까워지자 '맛있는 물을 달라'고 호소했다. 45일간 산 사람은 즈옥완이라는 의사였다."


*도고 부대는 대규모 시설이어서 비밀리에 인체실험을 하기에 알맞지 않았다. 게다가 1934년 9월 수용자 열여섯 명이 탈주해 내부 비밀도 드러난 상태였다. 일본은 방역급수부를 폐쇄하고 하얼빈에서 남동쪽으로 15㎞ 떨어진 핑팡으로 이전을 계획했다. 1935년 주변 네 개 마을 주민을 강제 퇴거시키고 1939년 731부대의 본부 관사, 각종 실험실, 감옥, 전용 비행장, 대원 가족 숙소, 소년대 숙소, 난방 파워 센터 등을 건설했다. 1942년 이곳에 거주한 일본인은 3000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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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팡 시설의 총면적은 80㎢였다. 특별 군사 지역으로 지정됐는데, 본부를 중심으로 약 6㎢ 지역은 흙벽과 고압전선, 굴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요 생물 병기 연구와 제조를 담당한 건물은 100㎡에 이르는 3층짜리 빌딩이었다. 인체실험 피험자를 수용한 특설 감옥 두 곳은 탈출할 수 없도록 안마당에 마련됐다.


*731부대에선 인체실험 피험자를 '마루타'라고 불렀다. '껍질 벗긴 통나무'라는 뜻이다. 주로 헌병대에 잡힌 반만주 항일 운동가들이었는데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러시아인도 있었다. 팡팡으로 연행하는 특별 수송은 '특이급'이라 불렸다. 마루타를 조달하기 위해 군에서 특별히 정한 이름이었다. 가와시마 기요시 세균 제조부장은 1949년 하바롭스크 재판 신문에서 특설 감옥에 여성, 어린이도 수용된 사실을 인정했다. 적어도 3000명이 이송돼 실험 대상이 됐는데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만 해도 포로에 대한 인도적 배려란 측면에서 일본 육군은 대체로 모범을 보였다. '군사기밀'이란 베일 뒤에서 도의의 길을 포기한 건 이시이의 인종차별적 인식과 잔학성, 의사 연구자로서 인격적 결함이 작용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아라키 도라사부로 교토대학 총장을 포함한 최고학부 인맥을 바탕으로 나가요 마타오 도쿄대 총장까지 끌어들인 막강한 배경은 군 중추부가 이시이를 신뢰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도고부대는 어디까지나 조직으로선 시범적 존재였다. 이시이는 새로운 시설을 만들어 살인만을 목적으로 하는 조잡한 실험을 학술적 연구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이에 대비해 1932년 마스다 도모사다 군의, 1937년 나이토 료이치 군의를 각각 해외로 유학 보내 기술을 습득하도록 했다. 한편으론 대학에서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본격화하기 위해 매력적인 거대 연구시설이 필요하다고 군 중추부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1936년까지 비공식으로 운영된 도고 부대는 관동군 소속으로 개편되면서 '광동군방역부'라는 이름을 얻었다. 급성 전염병 방역에 관한 조사연구와 세균전 준비를 주요 목적으로 하는 기관으로, 1938년 하얼빈 지구에 시설을 확충하기로 결정됐다. 세균무기 개발에 필요한 비용은 의회에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관동군 특별예산으로 편입됐다. 현재 가치로 연간 약 90억 엔 상당의 예산을 의회의 감시 없이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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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는 크게 1·2·3·4부로 나뉘었다. 1부는 세균연구부, 4부는 세균 제조부였다. 가와시마 세균 제조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후자는 2개월간 페스트균 300㎏, 티푸스균 800~900㎏, 콜레라균 1t을 만들 수 있었다. 일본군은 이렇게 제조한 페스트균을 중국 여러 지역에 살포했다. 2부는 식물 멸종과 곤충 연구반, 항공반 등으로 구성된 실전 연구 부서였다. 페스균을 감염시키는 벼룩을 여기서 번식시켰다. 3부는 하얼빈 난강에 있는 육군 병원 옆에 두고 731부대가 방역 급수하는 기관처럼 위장했다. 실제로는 페스트균을 넣는 도자기 폭탄 용기를 제조하던 곳이었다.


*이시이 부대의 주요 인물 가운데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간부 군위는 세 명이다. 하나같이 이시이의 브레인으로서 731부대를 지탱했다. 마스다 도모사다 군의 대좌는 육군 위생부 학생으로서 교토대학 의학부에 진학해 1926년 졸업했다. 그는 육군군의학교생이자 대학원생으로서 미생물학교실에 입실해 기무라 겐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 뒤 육군군의학교 교관으로서 이시이와 도고 부대를 설립하고, 2년간 독일과 프랑스의 군의학교에서 유학했다. 귀국 뒤 그는 육군성의무국원이 돼 731부대에서 2년 동안 근무한 뒤 난징에 있던 중지나방역급수부에 배속돼 인체실험과 무기 응용을 담당했다. 1939년부터 육군군의학교 방역연구실과 사카에 1644부대에서 부대장을 맡았으며, 1941년부터 이시이에 이어 군의학교 방역연구실에서 관동군방역급수부 업무를 지도했다. 전후에는 미군에 체포될까 두려워하다 195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나이토 료이치 군의 중좌는 이시이의 또 다른 오른팔로 불린다. 1931년 교토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육군군의학교와 교토대학 미생물학교실 대학원을 거쳐 군 대위가 됐다. 2년간 독일 코흐연구소에서 세균학,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에서 혈액 동결 건조술을 습득하고 군의학교 교관이 됐다. 그는 731부대에 상주하지 않고 군의학교 방역연구실에서 세균전 연구를 구상하며 이시이를 지원했다. 영어에 능통해 전후에는 통역으로 미군과의 면죄 협상에 나섰다. 귀국 뒤 일본 녹십자를 설립했는데, 혈액제제와 인공혈액 생산 과정에서 에이즈와 간염 감염 문제가 발생해 곤경에 처했다. 이시이와는 전후 사이가 틀어졌다고 전해진다.


*이시이의 또 다른 심복인 기타노 마사지 군의 중장은 1920년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근위제 4연대에 배속됐다. 1923년부터 도쿄대 전염병 연구소에서 활동하며 군의학교 교관이 됐다. 그는 731부대 설립 시 만주의과대학 미생물학 교수로 부임해 관동군 고문을 맡았다. 1942년에는 군의 소장으로 승진하며 제2대 731부대장으로 임명됐다. 주로 유행성 출혈열에 관한 연구에 매진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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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는 1933년부터 731부대 연구자들을 끌어모았다. 주로 대학 의학부의 젊은 교원들이었다. 교토제국대학의 요시무라 히사토, 이시카와 다치오마루, 오카모토 고조, 다베이 가나우, 사이토 고이치로, 이시노 다쿠지로, 하야시 이치로, 미나토 마사오, 다나카 히데오 등이다. 하나같이 1938년 '육군 기사 및 관동군방역급수부 부원'으로 채용됐다. 이 가운데 이시카와는 페스트 해부 표본을 들고 귀국해 가나자와대학 교수가 됐다. 표본을 전후 미국에 제공해 전쟁 책임을 면책받았다. 하야시는 731부대를 싫어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치듯 귀국했다. 이시이가 격노해 오랜 기간 찾아다녔다고 전해진다. 이시노는 이시이 부대에서 포로를 이용한 실험으로 간을 5분의 4까지 절제해도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후 교토 사쿄구에서 이시노 외과의원을 개업했다.


*731부대가 개발한 가장 유효한 생물 병기는 페스트탄이었다.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지 않았다.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에 감염시켜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넣어서 뿌렸다. 전후 부대원들의 증언을 수집한 노버트 H. 펠은 1947년 6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벼룩 번식법과 쥐를 통해 감염 방법을 방대하게 연구했다. 페스트 벼룩은 최선의 조건에서 약 30일간 생존하는데 감염력도 유지했다고 판명됐다. 1㎡당 벼룩 스무 마리가 있는 방에서 마루타를 자유롭게 움직이게 했는데,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이 감염돼 네 명이 사망했다." 실제로 중국에 살포한 세균 상당수는 페스트 벼룩이었다.


*731부대 소년 대원이었던 시노즈카 요시오는 페스트와 백신의 관계를 검증할 목적으로 진행된 인체실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애써 만든 세균이라도 감염력이 없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살상력이 없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어떻게 하면 독력이 강하고 살상력이 강한 세균을 만들지에 급급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실험용 쥐나 래트를 사용하고 대량 살육하는 것으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만 간단한 방법으로 인체에도 실시했습니다. 이 방법으로 나는 다섯 명을 살해했습니다."


*요시무라 히사토는 1938~1945년 731부대에서 동상을 연구했다. 피험자 손발을 인위적으로 얼려 관찰하는 실험이었다. 1941년 요시무라는 만주의학회 하얼빈 지부에서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해 강연하며 손가락이 얼었을 때의 피부 온도와 손가락의 용적 변화를 측정한 그래프를 제시했다. 그는 전후 같은 연구 성과를 영어 논문으로 다시 발표했다. 거기에는 생후 사흘인 신생아에게 실험한 결과도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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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에 부임한 가사하라 시로는 1944년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를 확정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유행성 출혈열은 중국 동북부와 소련 국경 부근에서 유행한 역병으로, '슨우열'이라 불렸다. 전후 가사하라는 마루타로 생체실험했음을 인정했다.


*1998년 난징 사카에 1644부대의 세균 공장이 있던 지역에선 두개골이 많이 들어있는 상자가 발견됐다. 법의학자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연구한 결과 두개골 수는 마흔한 개였다. 나이는 열일곱 살부터 서른여덟 살까지로 파악됐다. 성별은 남자가 스물일곱 구, 여자가 한 구였으며 나머지는 판별이 불가했다. 인골은 검었으며 황산으로 처리돼 있었다. 유전자 검사에서 콜레라균 장 독소 유전자가 확인돼 세균 인체실험 피해자로 규정됐다. 이 보고서는 발굴된 뼈, 현물 등과 함께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 보존되고 있다.


*731부대가 설립될 무렵 신징(창춘)에는 관동군 군마 방역창(100부대)이 설치됐다. 가축과 인간에 대한 실험이 자행됐던 곳이다. 군조(중사)였던 미토모 가즈오는 하바롭스크 재판에서 독물 실험을 보좌했다고 진술했다.


*페스트탄을 중심으로 한 생물 병기 공격은 확인된 사례만 7회가 넘는다. 대부분 이시이의 지휘 아래 731부대와 1644부대가 공동으로 실행했다. 생물 병기 살포의 위력은 감염된 개인의 이동을 통해 2차, 3차 감염을 일으킨다는 데 있었다. 예컨대 1940년 10월 4일 취현에 투하된 페스트탄은 15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취저우에 출장 중이던 철도원이 감염된 채 120㎞ 떨어진 이우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도 2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 쑹산 등 주변 마을에서도 전체 주민의 1/3에 해당하는 400명 이상이 같은 원인으로 사망했다. 더불어 1940년 11월 4일 투하된 페스트 벼룩은 주변 마을에 전염되고 확산해 7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세균 감염에 의한 희생자 확대는 페스트 유행이 자연 방생인 것 같이 보이게 해 세균 투하를 은폐할 수 있다는 효과가 있었다. 2007년 5월 최고 재판소에서 판결이 확정된 세균전 희생자 수는 약 1만 명이다. 이 수치는 주민으로부터 피해를 신고받아서 확인된 수치다. 가족이 모두 사망해서 신고자가 없거나 신원 확인이 안 된 희생자를 추가하면 이보다 더 많을 수 있다.


조선인도 731부대 '껍질 벗긴 통나무'였다(上)[알고보면] 원본보기 아이콘

*아사히신문은 2011년 10월 생물 병기 공격이 기록된 731부대의 내부 자료를 공개했다. 731부대 의학자 가네코 준이치가 1948년 도쿄대학에 제출한 의학 박사 논문의 일부인 'PX(페스트 감염 벼룩)의 효과약산법'이었다. 이에 따르면 감염자는 2차 감염을 포함해 2만5964명이었다. 줄곧 증거가 없다며 세균전을 부정해온 일본 정부를 무색하게 만든 자료였다.


*731부대는 생물 병기뿐만 아니라 516부대와 협력해 화학 병기도 개발했다. 무단강 북방 지구에서 이페리트 가스(미란성 가스) 효과를 측정하는 인체실험을 진행했다. 피험자 열여섯 명을 각각 다른 조건에 배치한 뒤 세 지역에 이페리트 자스 탄약 1만 발을 사격하고, 인체 영향을 관찰·기록했다.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의 이시야마 후쿠지로 교수와 그의 제자들은 1945년 5~6월 격추된 미군 B29 탑승원 포로 여덟 명을 수술 실험으로 살해했다. 폐·담낭 등을 적출하고, 뇌수술 등을 진행했다.


*다니무라 가즈하루 대동육군병원 군의관 소좌(소령)는 동계 위생 연구반을 조직하고 네이멍 구에서 동상, 텐트에서의 수술·지혈·수혈 등을 연구하는 야외연습을 진행했다. 실험에 동원된 중국인 여덟 명은 젖은 양말이나 장갑을 착용했다. 다니무라는 이들을 만취시키고, 굶기고, 아르토핀을 투여하는 등 다양한 조건 속에서 동상을 실험했다. 실험이 끝나면 가차 없이 살해했다.


*731부대와 별개로 중국 각지의 육군 병원에서는 '수술 연습'이란 명목으로 중국인 포로들을 마취해 생체 해부하고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대부분 신임 군의관이 전선에서 부상한 병사를 어떻게 치료하는지를 가르치는 훈련 목적으로 진행됐다.


*일본은 1907년 조선에 대한의원을 설립했다. 초대 원장에는 육군 군의관 총감 사토 스스무가 취임했다. 각 도에 설치된 자혜의원에도 모두 육군 군의관이 취임했다. 총감은 유사시에 대비해 병원을 군대 위생 시설로 전용하는 것을 염두에 뒀다.


조선인도 731부대 '껍질 벗긴 통나무'였다(上)[알고보면] 원본보기 아이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 위안소는 급증했다. 군의관은 위안소에 있는 군 위안부를 대상으로 성병 검사를 진행해 장병에게 전염되는 걸 막았다. 위안부 상당수는 한반도 출신 소녀들이었다.


*히라이 마사타미 군의관 중령은 1941년 일본병리학회 총회에서 '군영 병리학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특별강연을 했다. "사변 발발일인 1937년 7월 11일부터 1940년 7월 10일에 이르는 동안 전 군의 해부 수는 보고된 수가 1886구이며 특수 연구반이 실시한 218구를 더하면 대략 2000구에 달한다. 10분의 1에 해당하는 200구는 군의학교에 송부했으며, 공개되지 않은 연구 보고에 사용된 부검체는 약 200구에 달한다." 이 발언은 1989년 도쿄 신주쿠 육군 군의학교 철거지에서 발견된 100구 이상의 인골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참고 자료 : 15년 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엮음·하세가와 사오리-최규진 번역·발행처 건강미디어협동조합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2020)', 김창권 지음·발행처 나눔사 '일본 관동군 731부대를 고발한다(2014)', 전쟁과의료윤리검증추진회 지음·스즈키 아키라 번역·임상혁 감수·발행처 건강미디어 '731부대와 의사들(2015)', 니시노 루미코 지음·한국번역연구원 번역·발행처 예림당 '731부대 이야기(1995)', 진청민 지음·하성금 번역·발행처 교문사(청문각) '제731부대의 진상을 파헤친 일본군 세균전(2010)'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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