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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진보주의 음악 거장의 굴곡진 인생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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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 쿠퍼 감독·주연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결혼 초 배우 출신 아내 도움 받아 뮤지컬 등 작곡
한계 느끼자 동성 연인서 새 동력 구해 '미사' 완성
美 냉전기 겪은 진보주의자…견제로 대중 시선 의식
정치적 수모 열거 않고 아내 관계와 음악으로 은유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은 1969년 여름부터 '미사'를 썼다. 1966년 재클린 케네디로부터 케네디 센터 개관 공연으로 쓸 음악을 작곡해달라고 의뢰받았다. 번스타인은 크게 두 가지에 주안점을 뒀다. 하나는 전쟁의 도덕·정치적 문제 비판, 다른 하나는 '헤어'·'가스펠' 등에서 선보인 초교파적 인도주의와 에로틱한 인간 해방론의 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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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 쿠퍼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그 화룡점정의 순간을 다룬다.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이 가족들이 모여앉은 거실에 나와 악보를 펼쳐 보인다. "여러분, 중대 발표할게. 드디어 '미사'를 완성했어." 박수와 환호가 쏟아지는 와중에 아내 펠리시아 번스타인(캐리 멀리건)은 박차고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버린다. 수영장 다이빙대로 올라가더니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 모습을 응시하는 번스타인은 내심 언짢아한다.

펠리시아가 외면한 이유는 분명하다. 결혼 초에는 활발한 의견 교류로 남편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예컨대 뮤지컬 '춤추는 대뉴욕'을 감상하다가 무대에 함께 뛰어들어 춤췄다. 뮤지컬 작곡을 종용한 사람도 펠리시아였다. "이걸 왜 그만둬요? 이렇게 좋은데." "가벼운 음악이잖아요." "가볍다니요?" "내 말은, 내가 미국인 최초의 거장 지휘자 감이라잖아요." "그게 꿈이에요?" "난 꿈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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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번스타인은 배우 출신 아내의 도움을 받아 뮤지컬을 썼다. 상호 작용으로 청중의 지성과 미학적 감수성의 발전을 미리 경험했다. 새로운 음악·공연 예술 표현 양식을 향한 갈망도 키웠다. 1954년 작성한 수필 '위대한 미국의 교향곡은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확인된다. 신성화된 음악 양식이 이미 죽지 않았다면 죽어가고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뭔가 새로운 양식이 그 자리를 메우리라고 예견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통상적 예술 양식, 가령 발레와 현대무용, 뮤지컬의 대사, 오페라의 레치타티보 등을 뮤지컬 시퀀스, 대위법, 관현악 등과 융합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탄생할 악극은 뮤지컬, 오페레타, 오페라의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면서도 어느 하나에 귀속되지 않을 것이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에서 새로운 표현 양식을 향한 갈망을 채워주기에 펠리시아는 부족해 보인다. 번스타인의 고백에서 나타나는데, 펠리시아도 한계를 인지하고 만다. "왜 이렇게 울적한지 모르겠어." "피곤해서 그래.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여름이 내 안에서 잠시 노래하다 그쳤다.'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야." "내면의 여름이 노래를 멈췄다면 모든 노래가 멈춘 거야. 모든 노래가 멈췄다면 작곡은 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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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스타인은 동성 연인에게서 새로운 동력을 구했고, 그렇게 탄생한 곡이 '미사'다. 강도질을 정당화하기 위한 청빈함의 미화, 동물 멸종, 제국주의, 인구 폭발, 1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 것으로 전락한 종교, 상대에게 종교적 신앙을 강요하는 일 등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그가 보기에 당시 미국의 위기는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대중이 유행과 탐욕의 소비에 빠진 나머지 자국의 문제점을 바로 보려 하지 않고, 애꿎은 희생자를 양산한 베트남전조차 비판 없이 바라봤다.


이런 인식은 필립 딕의 '앤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배리 말츠버그의 '아폴로를 넘어서', 토머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 등에도 나타난 당대 문화 흐름이었다. 그러나 번스타인의 곡은 날이 다소 무뎌 있었다. 배리 셀즈 라이더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는 저서 '레너드 번스타인'에서 미사를 "진부한 감상주의로 이뤄진 곡"이라며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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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리듬 영역 및 음악적 기법을 선보였으며 뮤지컬로서는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 (중략) 그러나 비극적 차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으며 대니얼 베리건, 노암 촘스키, 한나 아렌트 등이 요구한 양심의 소리를 일깨우기에 역부족했다. 빠진 것은 그 시대의 가장 거대한 공포의 표현 또는 직접적 암시였으며, 만약 이것이 있었다면 그 작품의 깊이와 의미는 충분했을 것이다. 작품이 모티브로 삼은 위기의 면목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셈이다."


번스타인은 냉전기에 미국 시대상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은 진보주의자였다. 1950년 미국 국무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이듬해 핍박을 두려워한 나머지 뉴욕 필하모닉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가 베리건을 면회한 일 등으로 닉슨 행정부의 견제도 받았다. 그래서일까. 대중의 시선을 자주 의식했고, 가족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다. 쿠퍼는 대표적 예로 동성애를 가리킨다. 번스타인이 딸 제이미 번스타인에게 애써 사실을 숨긴다. "뭐가 어떻게 됐든, 누가 무슨 말을 했든 전부 다 질투에 눈멀어서 아빠를 음해한 거야. 질투. 내가 뭘 하든 질투해." "그럼 소문이 가짜야?" "가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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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일련의 정치적 수모를 조금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펠리시아와의 관계와 음악만으로 은유해 대신한다. 번스타인은 1976년 동성 연인과 살기 위해 아내와 결별했다. 그는 이듬해 암 투병 중인 펠리시아를 보살피기 위해 돌아왔다. 1978년 6월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깊은 슬픔을 지닌 남자로 남겨진다. 쿠퍼는 감격적 재회에 말러의 교향곡을 배치했다. 번스타인은 그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말러의 곡을 지휘할 때 황홀경에 빠졌다. 말러는 음악의 한계까지 이용해 심금을 울리는 주문을 만들어냈다. 자기 세대에 계몽주의와 진보주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줄어드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번스타인은 그 속에서 20세기 전반기에 유럽을 덮친 재앙과 공포를 예언하는 장문의 서사를 보았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듯한 흐름도 읽어냈다. 그 덕에 자신이 작곡하는 곡에 온전히 담지 못한 비극적 비전을 오케스트라와 청중에게 전할 수 있었다. 아내를 향한 사랑과 함께.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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