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팹 건설은 여러 산업 기술 필요
설계·장비 특화된 美, 리쇼어링 어려워
모리스 창, 1년 전 이 사태 이미 예견해
미국 애리조나에 건설 중인 TSMC의 반도체 공장(팹)은 조 바이든 미 행정부 반도체법(CHIPS)의 화룡점정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해당 법안에서 반도체 산업에만 527억달러 규모 보조금을 지원했고, 그중 상당수가 TSMC에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미국 반도체 자립의 첨병이 되어야 할 이 공장은 시작부터 삐거덕거리고 있습니다. 건설 완료 시기가 계속 지연됐다가, 이제는 2025년에야 양산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술력과 산업 규모를 가진 미국이 팹 한 채에 애를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 1위 반도체 국가 美, 고객사도 이미 줄 섰다
기술력이나 설비, 수요가 부족한 건 절대 아닙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1위의 반도체 산업을 보유한 국가이며, 반도체 관련 원천 특허와 기술 대다수도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위탁생산업체 TSMC는 ASML사의 EUV 노광기기 최다 보유사이기도 하며, 미국엔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 관련 설비 기업인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MAT)가 있지요. 따라서 부품 공급망 우려도 없습니다.
게다가 애리조나 팹이 열리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미국 기업들도 줄을 섰습니다. 애플, AMD 등 반도체 설계의 큰손들은 이미 TSMC 미국 지사에 물감을 주겠다고 선언한 참입니다.
미국에 부족한 건 반도체 기술 아닌 일반 산업 인재
문제는 첨단 반도체 설비나 기술이 아닙니다. 공장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해 TSMC의 마크 리우 회장은 지난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애리조나 공장이 전문 인력 부족으로 건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고 시인했습니다.
보통 반도체 팹을 논할 때 가장 많은 조명을 받는 설비들은 EUV 노광장치 등 반도체 생산 특수 장비들입니다. 대당 수천억원에 달하며, 제조 가능한 기업도 한정돼 있어 언제나 공급 불안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팹 건설 과정에선 이런 전문 장비들만큼이나 '일반 산업'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팹 내부엔 FOUP(웨이퍼를 보관하고 이동시키는 특수 용기)을 운송하기 위한 작은 레일들이 가득합니다.
![반도체 생산의 핵심인 EUV 노광장비 내부에도 수많은 정밀 모터와 계측 센서가 투입되며, 이런 부품 공급망을 관리하면 정밀기계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2061613345915786_1655354099.jpg)
반도체 생산의 핵심인 EUV 노광장비 내부에도 수많은 정밀 모터와 계측 센서가 투입되며, 이런 부품 공급망을 관리하면 정밀기계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반도체의 위치를 조정하고 패키징할 때 쓰이는 로봇 설비들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지정된 위치로 이동해야 하며, 이런 작업을 안정적으로 구현하려면 초정밀 관절용 전기 모터와 센서가 필요합니다.
한편 시설 내부는 극미세한 먼지 단 한 톨조차 생산 수율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청결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극초순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장치, 가스가 흐르는 특수 파이프가 팹 내부에 가득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팹이 멈추면 전 공정을 시작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전력 공급 장치도 이중 삼중으로 배치됩니다.
이처럼 팹에 투입되는 장비들은 단순히 반도체 산업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기계, 전기·전자, 화학 등 각 산업의 전문 장비들을 끌어와야 하며, 이런 다양한 부품의 공급망을 관리하고 다룰 줄 아는 각 산업계 전문가들을 배치해야 합니다. 즉, 반도체 팹 관리는 사실 반도체 기술이 아니라 일반 산업 기술에 더 가깝습니다.
미국에 부족한 건 반도체 기술자가 아닙니다. 반도체 기술로 따지면 미국은 독보적인 세계 1위일 겁니다. 하지만 미국이 대만, 한국, 중국 같은 '팹 강국'과 비교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건 반도체 시설 근무 경험이 있는 일반 산업 기술자들입니다. 리우 TSMC 회장이 대만에 있는 자사 엔지니어 600명을 애리조나 팹에 대신 투입하겠다는 강수를 둔 이유이기도 합니다.
1년 전 사태 예견했던 '대만 반도체 아버지' 모리스 창
이 문제는 TSMC의 창업자이자 '대만 반도체 산업의 아버지'라 불리는 모리스 창 TSMC 전 회장이 이미 예견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그는 미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반도체 제조 능력을 강화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노력은 헛수고"라고 강하게 질타했지요. 그 이유로는 "심각한 인력 부족, 높은 인건비"를 지적했습니다.
미국의 협소한 산업 인재 풀이 전체적인 팹 건설 비용을 늘릴 것이라고도 예측했습니다. 창 전 회장은 "미국에서 반도체를 제조하려면 대만보다 비용이 50% 더 든다"라며 "미국 내 파운드리 건설은 낭비적인 일"이라고 했습니다.
애리조나 팹이 2025년 문을 열고 양산에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는 계속될 겁니다. TSMC가 미국 팹에서 수익을 내려면 초기 투자 비용을 고객사에 전가해야 합니다. 미국 TSMC의 칩 단가가 대만이나 일본에 있는 TSMC의 칩 단가보다 더 높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미국산 전자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약화하겠지요.
결국 미국 TSMC가 수율을 안정화하고 장기적으로 팹을 유지할 만한 인적·물적 기반을 확보하려면, 미국 정부가 계속해서 지원을 해줘야 할 겁니다.
하지만 팹의 유지 비용은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애리조나 팹 건설에만 300억달러 이상이 투입됐으며, 앞으로도 새 설비를 투입하고 공장을 개량하려면 더 많은 돈이 들 겁니다. 바이든 행정부, 그리고 그 이후에 정권을 넘겨받을 새 행정부가 '미국 반도체 자립'의 숙원을 이룰 때까지 계속 TSMC에 백지 수표를 써줄 수 있을 것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분명 미국은 여전히 세계 1위의 반도체 산업을 가진 나라이지만, 이미 오래전에 글로벌 분업화를 이룬 '칩 생산'을 다시 국내로 가져오기로 한 게 현명한 전략인지는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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