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성중종주(성삼재-중산리)' 34km
울긋불긋 활활 타오르는 지리산 단풍길
산꾼들은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즐겨
동서울-성삼재행 버스 매일밤 11시 출발
산을 잘 몰라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설레게 하는 산이 있습니다. 바로 지리산(智異山)입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고 아늑합니다. 우리 민족의 정기와 설움, 한(恨)을 품은 산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대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은 "지리산에 올라야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그리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본다. 고 말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지리산에 들었습니다. 이번 여정은 산행이 아니라 종주입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꿈'이 지리산 종주입니다. 새벽 성삼재에서 첫발을 내디딜 때의 긴장감, 벽소령에서 쏟아지는 별들과 지새는 밤, 천왕봉에서 마주친 장엄한 일출이 함께하는 그런 길입니다. 사실 지리산을 종주한다는 것은 '산을 타는 일'만은 아닙니다. 끝없는 자문자답(自問自答) 속에서 자신을 찾고, 누구에게는 자신 안의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이고, 또 누구에게는 세상을 보는 지혜를 얻는 길이기도 합니다. 종주는 과거 산꾼들 사이에는 불문율처럼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를 말했습니다. 요즘은 성백종주(성삼재~백무동)와 성중종주(성삼재~중산리)를 대표적인 지리산 종주 코스로 꼽습니다. 이중 많은 사람들이 성삼재에서 시작해 중산리에서 마무리 하는 34km 성백종주를 즐깁니다. 산꾼들에겐 짝퉁 종주로 불리지만 말입니다. 10년만에 다시 지리산 종주에 나섰습니다. 깊어가는 지리산의 가을단풍과 함께 하는 그런길입니다.
#넉넉하고 아늑한 지리산의 품에 들다
성삼재 탐방로 입구는 오전 3시부터 개방된다. 노고단고개까지는 2.3km. 탐방안내도에 따르면 전체 종주 구간 중 가장 쉬운 코스다. 오전 4시. 드디어 첫발을 내디뎠다. 지리산에 들어섰다는 묘한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칠흑 같은 밤, 보이는 불빛이라곤 종주 일행들의 헤드랜턴이 전부다. 완만하고 너른 길을 따라 40~50여분을 오르면 노고단대피소다. 지금은 한창 보수공사중이다.
일출을 보기 위해 서둘러 노고단으로 향한다. 노고단 정상에 오르려면 인터넷 예약이 필수다. 특별보호구역이라 오전5시부터 오후4시까지만 열린다. 노고단탐방지원센터를 통과하면 정상까지 700m 정도 편안한 나무 덱 길이 이어진다. 20분만 걸으면 정상이다.
순간 섬진강의 습한 기운이 몰려들어 노고단이 '구름바다'로 변한다. 지리산 10경중 하나인 '노고단 운해'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노고단 일출을 기다린 탐방객들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한다.
이젠 본격적으로 종주를 위한 지리산의 주능선에 들어섰다. 산 아래로 수천 년을 지리산에 기대어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들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임걸령까지는 3.2km로 큰 굴곡 없이 참나무숲길의 연속이다. 예전에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향해 화살을 쏘고 말을 타고 달리면 말이 화살 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만큼 평탄하다.
드디어 구름 위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출의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 임걸령까지 힘들이지 않고 도착했다. 수고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맛. 임걸령 물맛이 그러했다. 물병에 샘물을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서 반야봉(般若峰)으로 향한다. 다음 목표인 노루목까지는 꽤 가파른 돌길 오르막이다.
평탄한 길을 따라 노루목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반야봉이고 오른쪽으로는 삼도봉이다. 노루목에 등산배낭을 두고 반야봉을 찍고 내려오는 탐방객들도 많다.
반야봉은 지리산이 어머니 같은 후덕함을 지녔다면 이곳을 얘기한다. 지리산의 중앙부인 반야봉에서 보는 '반야낙조'는 황홀하기 그지없다.
반야봉을 내려서 삼도봉을 향해 오른다. 삼도봉으로 가다 우측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이 지리산 단풍 중 가장 아름답다는 피아골이다. 소설가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피아골의 단풍이 그리도 핏빛으로 고운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고 했다. 지금 그 피아골이 단풍으로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삼도봉에는 경남ㆍ전남ㆍ전북 3도의 경계점을 나타내는 삼각뿔 모양 표석이 박혔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경계일 뿐, 자연은 영호남ㆍ동서남북 구분이 없다.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에서 토끼봉에 이르는 구간은 급경사 난코스다. 숨이 턱을 차오르는 지루한 오르락이 계속 이어지다 갑자기 너른 공터가 나타나면 바로 화개재다. 예전에 경남의 소금과 해산물이 전북의 삼베, 산나물 등 내륙특산품과 물물거래 되던 장소로 한국판 '차마고도' 같은 곳이다.
화개재에서 50여분을 오르면 울창한 참나무와 구상나무 등이 뒤엉켜 청량감을 실어주는 토끼봉이다. 이곳에서 뒤돌아보면 지나온 노고단과 반야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토끼봉 정상의 탁 트인 헬기장 가장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꿀맛 같은 점심을 먹는다. 배낭은 조금 비웠는데 몸은 무겁다.
토끼봉에서 연하천대피소로 가는 길은 구상나무, 분비나무 등 침엽수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지리산 대피소들이 대부분 평탄한 곳에 있는데, 반해 연하천만 숲속에 자리해 사시사철 물이 샘솟는다.
연화천을 나서자 붉은 단풍나무가 눈앞에 펼쳐진다. 평지가 이어지나 싶더니 이내 삼거리(삼각고지)에서 벽소령 쪽으로 오르막이다. 유독 기암괴석이 많다. 너럭바위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저 멀리 벽소령과 천왕봉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선명한 천왕봉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항상 구름에 쌓여있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처럼 나란히 선 형제봉 바위를 지나면 벽소령이 코앞이다. 넉넉하게 품어준 지리산에서 하루가 저물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고통을 이겨내며 가는길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벽소령을 나섰다. 벽소령에서 세석대피소로 가는 6km여는 지리산 종주 중 가장 험한 고난의 길이다. 산허리를 돌아 오롯한 소로 길을 40여분을 오르자 선비샘이 나왔다. 샘은 10여년전과 달리 물줄기가 가늘다. 졸졸졸 흘러내리는 물을 겨우 받아 한 모금 한다. 그래도 물맛은 예전 그대로다.
물통에 물을 채워 세석으로 향했다. 세석까지의 길은 육산인 지리산에서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암릉길이다.
일곱 선녀의 전설이 깃든 칠선봉까지 젓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오르고 또 올랐다. 칠선봉은 이름에 걸맞게 가까워질수록 구름으로 휩싸인다. 다리는 돌덩이지만, 풍경만큼은 신선이 구름 속을 거니는 듯하다. 칠선봉을 지나 영신봉까지는 오르막 코스다. 막바지에 나무ㆍ철재 계단이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 험한 산길을 왜 왔을까'라는 후회가 몰려온다. 하지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목표는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가장 정직한 이치에 발걸음을 내딛는다.
단풍으로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한 봉우리에 올라서니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교수와 함께 지리산 종주에 나선 한서대 학생들이다. 지친 기색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다. 속으로 역시 젊음이 좋긴 좋구나를 외쳐본다.
학생에게 지리산 종주가 어떤지 물었다. “조금 힘들지만 교수님과 친구들과 함께한 지리산은 상상 이상으로 멋지다.”는 답이 돌아왔다.
세석까지 학생들과 동행을 한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좁은 숲길이 끊어지고 느닷없이 나타난 드넓은 평원. 세석평전은 해발 1,703m의 촛대봉과 1,651m의 영신봉을 좌우로 세우고 둘레 8km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다. 눈앞에 보이는 세석은 온통 울긋불긋 단풍으로 화려하다. 구상나무가 자리한 능선을 넘나드는 골마다 단풍이 산 아래로 뻗어가고 있다. 세석은 원래 매년 5월 하순부터 6월 초까지 수만 그루의 철쭉나무가 한꺼번에 붉은 꽃을 피워내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다. 철쭉 못지않게 단풍의 향연도 눈부시다.
촛대봉에 올랐다. 저 멀리 천왕봉(天王峰ㆍ1,915m)이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은 촛대봉에서 볼 때 가장 웅장하다. 왼쪽의 연하봉, 제석봉(帝釋峰)과 오른쪽의 써리봉을 거느린 채 천하를 호령하고 있는 형국이다. 고개를 돌려 세석평전을 보면 노고단, 삼도봉, 반야봉 등 내처 걸어온 봉우리들이 화려한 단풍으로 길게 꼬리를 물고 있다.
해거름이 시작되기 전 장터목에 도착했다. 장터목은 산청 시천과 함양 마천 사람들이 농산물을 물물교환하던 장터였지만 빨치산이 준동하면서 폐쇄돼 지금의 대피소가 됐다.
#3대에 걸친 덕(?) 살아 펄떡이는 천왕봉 일출을 보다
새벽 3시30분. 드디어 천왕봉을 향해 막바지 걸음을 내딛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길에 여러개의 랜턴이 한 줄로 이어지며 위로 향한다.
나무 덱 계단부터 시작해 정상까지는 대부분 오르막이다. 사방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다. 이정표에 적힌 해발 고도를 보며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20분 만에 제석봉(1808m), 30분을 더 걸어 통천문(1814m)에 닿았다. 예로부터 부정한 자는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는 전설이 있는 하늘로 통한다는 바위굴이다. 그렇게 부정한 것들을 씻어내고서야 오를 수 있는 곳이 천왕봉이다.
다소 가파른 길을 걸어 오르자 한줄기 랜턴빛 속으로 천왕봉이란 글씨가 찍혔다. 아~지리산 천왕봉에 섰다. '한국인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정상석의 글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말 그대로 정상에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온 몸에 전율이 전해진다. 천왕봉은 노고단을 비롯해 1,000m가 넘는 준봉 20여개를 거느린 지리산의 최고봉이다.
희미해진 달빛과 별빛이 스러지자 중봉과 써리봉 사이로 여명이 밝아온다. 겹겹의 산들의 연봉은 북쪽의 덕유산을 향해 달리는가하면 서쪽의 노고단을 향해 힘찬 용틀임을 하기도 한다.
섬처럼 둥둥 떠 있는 봉우리 사이를 흐르는 운해가 연분홍으로 물든다. 순간 연분홍 운해가 다시 오렌지색으로 채색된다. 그리고 붉은 해가 살아 펄떡이며 솟아올랐다. 3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바로 천왕봉 일출이다.
"와~이런 일출을 보다니 정말 대박이다" 휴대폰에 일출을 담는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온다.
해외에서 지리산을 보기 위해 왔다는 한 탐방객은 "지리산을 처음 찾은 날 이렇게 일출까지 보게 되니 이제 소원이 없다 며 감격했다.
지리산 10경중에서도 으뜸인 천왕봉 일출의 맛본 산행객들이 하산하거나 다른 봉우리로 걸음을 옮긴다. 천왕봉은 홀로 긴 명상에 잠긴다.
이제 내려가야 한다. 중산리길은 지리산 등산로중 천왕봉으로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다. 그만큼 가파른 바윗길이 끝없이 펼쳐지고 내리막 경사도 심하다.
가파른 계단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법계사다. 1,400m 높이로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은 삼층석탑이 유명해 보물로 지정돼 있다.
법계사와 아래위로 붙은 곳이 로터리대피소다. 목을 축이고 다시 걷는다. 참나무, 박달나무 등 우거진 숲길을 내려가면 칼바위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중산리 계곡 물소리가 반갑다. 성삼재에서 시작해 중산리로 하산하는 ‘성중종주’ 34km의 끝이다.
종주를 마쳤다는 뿌듯함보다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힘들게 지나온 길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지리산을 나서자마자 다시 지리산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는 자식처럼......
◇여행메모
△가는길=지리산 종주를 당일치기로 다니는 산꾼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1박 2일이나 2박3일 일정을 잡는다. 동서울에서 성삼재로 가는 버스가 매일밤 11시 출발, 3시에 성삼재 도착. 하산후에는 원지나 진주에서 서울행 버스가 수시로 있다. 승용차는 불편함이 많다. 장거리운전은 차치하고 성삼재에서 차를 두고 종주 후 다시 복귀도 번거롭다.
△준비물=가을, 겨울철 산행은 보온을 위해 다운재킷은 필수과 랜턴은 꼭 챙겨야한다. 특히 스틱은 2개를 꼭 준비한다. 스틱을 이용하면 체력 소모량을 30%까지 줄여준다. 등산화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중등산화가 좋다. 천왕봉에서 중산리까지의 내리막길은 무릎에 많은 부담을 주기에 여유 있게 하산하고 무릎 보호대 준비. 코로나19 이후 대피소에서 모포를 대여하지 않기에 침낭을 챙기는 게 좋다. 대피소 난방은 잘 되어 있다. 버너와 코펠 등 취사도구도 필요하다. 무거운 짐을 생각하면 간편식의 요깃거리를 챙긴다. 물, 햇반 등 필요한 것은 대피소 매점을 이용해도 된다.
지리산=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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