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전문가 22명 설문조사
통화정책 최대 변수는 국제유가
고금리·고물가…스태그플레이션 우려
불확실성 큰 만큼 한은 일단 동결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 감산에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 간 전쟁까지 터지면서 국제유가가 한국은행 통화정책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물가 부담이 커지면 미국과 한국 모두 고금리 기조를 더 오래 지속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높은 가계부채 비율, 부진한 수출 상황과 맞물려 경기 회복을 더욱 더디게 할 것으로 우려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중동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한은과 정부가 물가·경기 관리에 모두 실패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침체)'이 닥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아시아경제가 16일 국내외 증권사 애널리스트, 경제연구소 이코노미스트 등 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상당수 전문가는 앞으로 한은 통화정책의 핵심 변수(중복답변)로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불안과 미국 통화정책, 가계부채를 꼽았다. 지난 8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실시한 설문조사와 동일하게 국제유가가 9명으로 가장 많았고, 가계부채와 미국 통화정책이 7명,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4명으로 뒤를 이었다.
감산에 전쟁까지…국제유가 급등하면 고금리도 계속
전문가들은 국제유가 상승이 앞으로 한은이 통화정책 방향성을 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중순부터 시작된 사우디와 러시아의 원유 감산으로 유가 상승 압력이 커졌고, 최근에는 이스라엘-하마스 간 전쟁으로 중동 정세까지 불안해지면서 불확실성이 더 짙어졌기 때문이다. 국제유가는 지난달 27일 배럴당 93~94달러로 치솟았다가 80달러대로 소폭 하락한 뒤 지난주 다시 90달러를 넘어섰다. 증권가에선 이번 무력 충돌이 중동 전쟁으로 확전할 경우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길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물가 부담이 더 커진다. 이는 중앙은행의 긴축 통화정책을 유지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은 지난 7월 2.3%까지 떨어졌으나 이후 국제유가가 오르면서 8월 3.4%, 9월 3.7%로 증가폭이 커진 상황이다.
윤석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중동 사태는) 다른 나라의 개입이나 확전 가능성 등 불확실성이 높아 향후 방향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미국과 중동 지역의 국제 관계가 악화될 경우 유가 불안에 따른 물가 악영향이 우려되고, 이는 주요국의 통화정책 여건을 변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선태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도 "수입 물가 흐름을 규정하는 핵심 변수는 국제유가와 원·달러 환율"이라고 말했다.
한은도 국제유가 흐름을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12일(현지시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가 열리는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 유가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라며 "한은으로서는 유가가 변동할 때 근원 인플레이션이 예상한 경로대로 움직일지, 그보다 더 높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늘어나는 가계부채…한은 금리인하 늦어질 수도
최근 다시 크게 늘고 있는 가계부채도 한은의 통화정책을 제약하는 요인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5%로, 증가폭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계부채는 지난해 한은의 가파른 기준금리 인상으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올 초 정부의 대출 규제 완화와 특례보금자리론 도입, 집값 반등 기대감 등으로 다시 급증해 사실상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에 실패했다.
한은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100% 아래로 낮춘다는 방침이기 때문에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상황에선 쉽게 금리인하로 돌아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혜영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긴축적인 금융 여건에도 가계대출 디레버리징이 지연되고 있다"며 "한은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상승하지 않도록 면밀히 관리할 필요가 있으므로 긴축 기조를 한동안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예하 키움증권 연구원도 "가계부채는 한은의 금리 인하폭을 제한시킬 수 있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고금리+가계부채=경기 위축…'스태그플레이션' 오나
만약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글로벌 물가 부담을 가중시켜 고금리 기조가 길어진다면 늘어난 가계부채가 이자 부담 증가, 민간 소비 둔화, 내수 침체, 투자 부진으로 이어져 경기 침체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국제통화기금(IMF)과 석학들 사이에선 물가 상승 속 경기가 침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IMF는 최근 발표한 10월 세계경제전망에서 내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은 2.9%로 0.1%포인트 낮추고, 세계 물가상승률 전망은 5.8%로 0.6%포인트 높이기도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나리오를 예측했던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지난 12일(현지시간)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에 확전 국면에 접어들면 스태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며 "중앙은행들에는 엄청난 딜레마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과 경기회복에 모두 실패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상훈 하나증권 연구원도 "확전에 따른 국제유가 급등이 최대 변수가 될 수 있는데 이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를 확대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금융 불안은 금리인하 요인…복잡한 한은, 일단 동결
이외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리스크와 이로 인한 비은행 금융회사 부실 역시 한은의 통화정책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9월 춘천 '레고랜드 사태' 때와 비교하면 금융시장 상황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글로벌 긴축 기조로 인한 부동산 PF 연쇄 부실 가능성은 남아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달 말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 증권사의 PF 대출 중 1개월 이상 연체된 금액의 비중이 올해 6월 기준 17.3%로 급증했다며 "금융사의 자산건전성 악화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계부채와 고물가 부담이 크지만 한은 입장에선 고금리를 오래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한은은 당분간 기준금리 동결 기조를 이어가면서도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는 행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유가와 가계부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부동산 PF 등 변수가 많은 만큼 한은은 금리를 올리기도, 내리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최소 내년 상반기까지는 현재 고금리 수준을 이어갈 전망이다. 김지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전쟁 등 유가를 자극하는 이벤트가 인플레이션을 꾸준히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기준금리 추가 인상은 어려워도 인하가 지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원 기자 nest263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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