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두고 더 심해질 듯
국회엔 옥외광고물법 12건 계류중
가이드라인 있지만 ‘무용지물’
인천·부산시 등 자체 규제 나서
지난해 말부터 정당 현수막을 무제한으로 걸 수 있게 되면서 ‘친일매국’, ‘조작뉴스’, ‘대선 공작’, ‘이게 나라입니까’ 등 혐오·비방 문구가 거리를 뒤덮고 있다. 무분별한 현수막들이 도시 미관을 해치고,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지만 국회에서의 관련 법안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총선을 앞두고 연말까지 현수막 공해는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혐오 확대, 안전·환경 위협= 1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에서 만난 김모씨(27)는 “지하철역이나 사거리 등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기본적으로 4~5개 이상 붙어 있다. 횡단보도를 빨리 건너려다가 바로 옆에 있는 현수막에 걸려 넘어질 뻔한 적이 있다”며 “정당들이 정책을 알린다기보다는 서로 헐뜯는 용도인 것 같고 환경오염도 걱정된다”고 비판했다. 회사원 이모씨(27)는 “집 근처 곳곳에 현수막이 많이 걸려있다. 대부분 조롱식이었다”며 “저런 현수막을 달아도 되나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김성권씨(32)는 “대체 법이 어떻게 돼 있어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현수막에 대한 규제가 꼭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정당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의 경우 별도의 신고·허가·금지·제한 없이 현수막을 표시·설치할 수 있다. 정당 명칭과 설치 업체의 연락처만 기재되면 최대 15일 동안 아무 장소에 게시할 수 있다. 정당 현수막이 난립하면서 관련 민원은 급증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옥외광고물법 개정안 시행 전인 2022년 9월부터 11월까지 정당 현수막 관련 민원은 6415건이었으나 시행 후인 지난해 12월11일부터 올해 3월31일까지 1만4197건으로 뛰었다. 올해 4월에는 4195건, 5월에는 3680건이 접수돼 법 시행 전(평균 2115건)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현수막은 행인 안전도 위협하고 있다. 올해 1~6월 현수막 관련 사고는 총 8건 발생했다. 지난 1월 경북 포항시에서는 신호등과 가로등 사이에 현수막 4개가 설치됐는데, 강풍이 불어 떨어지면서 보행자가 머리를 다쳤다. 지난 2월 부산 중구에서는 노인이 정당 현수막에 걸려 낙상했고, 이어 3월 서울 노원구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보행자가 현수막 끈에 걸려 머리를 다쳤다. 폐현수막 처리 문제 역시 심각하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25개 자치구에서 발생한 폐현수막은 총 236.3t에 이른다. 장바구니나 모래주머니로 일부 재사용하는 것 외에는 재활용이 거의 되지 않고 있다. 폐기 목적의 소각·매립에 투입되는 세금과 폐기 과정에서 방출되는 각종 오염물질을 처리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도 들어간다.
국민 여론은 정당 현수막에 대해 부정적이다. 연합뉴스·연합뉴스TV가 공동으로 여론조사 업체 메트릭스에 의뢰해 지난 8월 5~6일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당 현수막의 게시 장소와 개수 등을 제한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0.6%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정당 현수막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연령이나 지역, 정치적 성향 등과 관계없이 전 계층에서 높았다. 해당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p다. 휴대전화 가상번호(100%)를 이용한 전화 면접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응답률은 14.5%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국회 지지부진, 지자체 각개전투= 국회에는 정당 현수막 규제를 위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총 12건 계류 중이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읍·면·동별 2개 이내 개수 제한, 보행자·교통수단 안전 저해 금지, 기간 만료 시 신속 자진 철거 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다.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은 학생들의 교통안전과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학교로부터 200m 범위 안에는 정당 현수막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박성민 국민의힘 의원은 시·도 조례로 지정된 장소에만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을 내놨다.
행안부는 지난 5월 '정당 현수막 설치·관리 가이드라인'을 내놨지만 무용지물이다. 해당 지침상 어린이·노인·장애인 보호구역에는 정당 현수막을 설치할 수 없고, 보행자가 통행하거나 차량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할 우려가 있는 곳에서는 현수막 끈의 가장 낮은 부분이 땅에서 2m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한다. 교통 신호등이나 안전표지를 가려서는 안 되며, 가로등 하나당 2개까지만 설치될 수 있다. 그러나 법적 구속력이 없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정당 현수막에 대해 법적으로 구멍이 너무 많다. 가이드라인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을 알고 악용하는 정당들이 많다”며 “시의회에서 조례가 추진되고 있지만 총선 앞두고 통과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지방자치단체들은 자체적인 규제에 나섰다. 인천시는 전국에서 최초로 정당 현수막 개수 제한 조례를 제정해 철거에 나섰고, 부산·광주·울산시에서도 잇따라 시행됐다. 행안부는 상위법인 옥외광고물법에 어긋난다며 집행정지 신청을 냈으나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나머지 시도들에서도 조례 제정에 착수했지만, 최종적으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총선을 앞두고 시·도의원들이 국회의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연말이 지나면 선거법상 자연스럽게 규제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선거법상 총선으로부터 120일 전인 오는 12월12일부터 정치 현수막 게시가 제한된다.
전문가들은 정당 현수막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서종국 인천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현수막 정치는 후진적인 정치 선동 수단이고, 이제 사람들이 현혹되지 않는다”며 “시민들의 보행이나 교통에 지장을 주고 안전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일반 현수막과 달리 특권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정당 현수막이 국민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정당별로 하나씩만 건다든지 합의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임춘한 기자 choon@asiae.co.kr
황서율 기자 chest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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