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즈베리파이 재단이 개발한 소형 컴퓨터
개발도상국 어린이 교육 지원용으로 개발
이젠 '협동로봇' 제어 장치로 자리 매김해
IT 분야에 관심을 가진 분은 '라즈베리파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국의 비영리단체 '라즈베리파이 재단'이 개발한 초소형 컴퓨터로, 단돈 40달러에 불과해 개발도상국 청소년의 프로그래밍 교육용으로 인기를 끌었지요.
하지만 라즈베리파이는 더이상 단순한 '빈국의 컴퓨터'가 아닙니다. 현재 로봇산업 최대의 화두인 '협동 로봇'의 핵심 부품으로 손꼽히기 때문입니다.
자선단체서 개발한 취미·교육용 미니컴퓨터
라즈베리파이 같은 초소형 컴퓨터를 통상 '싱글 보드 컴퓨터'(SBC)라고 칭합니다. 단 한 개의 기판 안에 컴퓨터의 모든 구성 요소를 모아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라즈베리파이 자체는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지만, 내부엔 CPU, GPU, 파워, 메모리(RAM), USB 포트 등 컴퓨터에 필요한 모든 부품은 다 들어 있습니다.
과거 라즈베리파이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개발도상국 어린이의 IT 교육용으로만 활용됐습니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과 휴대성이 아마추어 개발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라즈베리파이 같은 SBC는 금세 새로운 취미 도구로 자리 잡았지요.
이제 SBC는 훨씬 진지한 분야에서 사용됩니다. 로봇, 드론, 기업 연구개발(R&D)용 프로토타입 등에도 라즈베리파이가 투입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영역은 협동 로봇입니다.
라즈베리파이는 어떻게 협동 로봇 '두뇌' 됐을까
최근 상장한 '두산로보틱스' 등 협동 로봇은 로봇 산업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손꼽힙니다. 이 로봇은 일반 공장에서 볼 수 있는 통상 '산업용 로봇'과는 구별됩니다.
산업용 로봇은 단순 작업을 빠르게 반복하는 거대한 로봇팔입니다. 신속하고 튼튼하지만, 대신 위험합니다.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동작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산업용 로봇 설비가 설치된 공간은 펜스를 두르는 등 안전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요.
하지만 협동 로봇은 인간이 있는 곳에서 작동하는 로봇입니다. 산업용 로봇보다는 훨씬 작지만, 더 똑똑하고 민첩합니다. 인공지능(AI)을 부여한 협동 로봇은 주변의 사물을 인지하고 스스로 팔 위치를 교정하는 등 유연한 동작도 선보이지요.
일반 산업용 로봇은 전용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동하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로직 컨트롤러'(PLC)를 통해 제어한다. 사진은 LS일렉트릭이 개발한 PLC 기기. [이미지출처=LS일렉트릭]
원본보기 아이콘이 때문에 협동 로봇은 산업용 로봇과 아예 다른 '두뇌'를 탑재해야 합니다. 산업용 로봇은 흔히 '프로그래밍 가능한 로직 컨트롤러', 즉 PLC로 작동합니다. 로봇 팔을 통제하는 거대한 컴퓨팅 장치인데, 로봇 분야에서만 사용되는 자체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해 명령어를 짭니다. 그만큼 다루기 어렵고 수정도 힘들지만, 대신 신뢰성이 높지요. 약간의 오차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공장 환경에 적합합니다.
협동 로봇은 PLC보다는 일반 컴퓨터를 통제 장치로 쓰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인간과 함께 일해야 하니 명령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산업용 로봇보다 훨씬 복잡한 행동도 구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즈베리파이는 이런 협동 로봇의 두뇌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크기, 전력 소모, 그리고 비용을 갖췄기에 주목받습니다. 지금도 많은 아마추어 개발자들이 라즈베리파이와 협동 로봇을 연결해 로봇제어를 실현합니다.
또 라즈베리파이는 자체 운영체제(OS)를 통해 일반적인 프로그래밍 언어(파이썬, C++ 등)를 사용할 수 있고, 인터넷도 연결 가능합니다. 즉 오늘날 흔히 쓰이는 AI 모델을 로봇에 이식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덕분에 응용 가능한 베리에이션도 넘쳐납니다. 라즈베리파이와 엔비디아 GPU를 연결한 지능형 농장 로봇이 개발되고, 라즈베리파이와 이미지센서를 연결해 쓰레기 더미에서 특정한 물품만 골라 분리수거할 수 있는 자동 로봇도 발명됐습니다.
SBC 시장의 이유 있는 지배자…'이타적 자본' 성공 사례
SBC의 수익성이 인정받으면서, 라즈베리파이와 유사한 제품을 만드는 업체들도 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제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라즈베리파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히 가격 때문만은 아닙니다. 2006년 창립 이래로 '저렴하고 우수한' 컴퓨터 개발에만 집중해 온 라즈베리파이는 그 어떤 업체보다도 '가격대성능비'를 끌어 올리는데 이골이 난 업체입니다.
예를 들어 이달 초 출시된 최신 기기인 '라즈베리파이5'의 경우, 이전 제품인 파이4와 비교해 컴퓨팅 성능은 최대 4배 상승했지만 가격은 5달러밖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또 라즈베리파이는 여러 업체와 협력해 자체 반도체를 설계하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연간 500~700만대의 SBC를 생산할 수 있는 자동화 공장도 갖췄습니다. 심지어 공장 내부에 있는 로봇들도 라즈베리파이로 작동하지요.
스마트폰, 클라우드 서버, AI 등 최신 IT 혁신은 모두 하드웨어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됐습니다. 라즈베리파이가 앞으로도 SBC의 '달러당 성능'을 폭발적으로 증진할 수 있다면, 협동 로봇은 4차산업혁명의 진정한 중핵으로 자리 잡을 겁니다.
라즈베리파이의 소유권을 보유한 라즈베리파이 재단은 영리 법인인 '라즈베리 파이 리미티드(limited)'를 자회사로 설립해 본격적인 글로벌 IT 대기업으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영국 런던 증권거래소(LSE)에 기업공개(IPO)를 한다는 방침입니다.
IT 업계는 자주 무한 경쟁, 독점과 과점, 가격 인상 등의 이야기로 점철돼 있지만, 라즈베리파이의 성공 사례는 IT 산업 내에서도 '이타적 자본(Philanthropic capital)'이 작동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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