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검찰에 불법 구금 당한 이치근씨 인터뷰
"여전히 국가 폭력의 벽 마주한 느낌"
"아무런 이야기도, 연락도 없었다." 국가폭력 피해자인 이치근씨(62)는 여전히 울분에 차 있었다. 그는 과거 서울지방검찰청(현 서울중앙지검)에서 접수계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진정서를 위조한 7급 수사관의 공범으로 지목돼 1991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지난 7월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이씨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불법 구금과 자백강요 등 강압수사로 인해 누명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위는 정부에 이씨 사건과 관련해 사과 및 피해회복, 명예 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이치근씨(62)는 1991년 진정서 위조 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지만 불법 구금, 자백강요 등 강압수사로 인한 누명인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드러났다. 이씨는 이달 중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신청할 예정이다. /제공=이치근 본인
진실화해위의 권고가 나올 때 이씨는 힘들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일주일 넘게 검사실에 갇혀 사표를 쓰라는 검찰계장의 협박, 누명을 쓴 후 절로 도망친 아들을 보고 힘들어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런 기억을 극복하고 진실규명을 신청하게 한 것은 지금까지 그를 도왔던 사람들의 응원이다. 이씨는 "굳이 검찰 조직에 도전해야 하냐는 주변인도 있었다"며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지 고민했지만 항상 힘을 불어넣어 준 사람들 덕에 끝까지 진실화해위의 조사를 기다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의 권고 이후, 이씨는 검찰 등 정부기관이 나서서 그에게 사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과나 명예회복 조치를 취하겠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씨는 "차라리 피해를 인정하지 않았으면 기대도 없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방치하는 건 2차가해와 다름없다"며 "여전히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란 벽에 마주한 느낌이다"고 말했다.
진실위, 88개 국가기관·지자체에 피해 회복 권고했지만…답변 못 받아
지난 3년간 진실화해위는 여러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지만, 이씨처럼 피해자들은 여전히 실질적 피해 회복을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지난 6월30일 기준 진실규명 결정 사건 102건·정책권고 1건과 관련해 88개 소관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에 피해자 명예회복 등을 권고했지만, 관련 답변은 단 한 건도 받지 못했다. 2020년 12월10일 출범한 이후 1799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음에도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실질적인 회복 조치는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과거 국가폭력을 확인한 경우 국가기관에 피해회복과 관련해 권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법적 한계가 있다. 2005년 첫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진실화해법)은 진실화해위가 국가기관에 권고해도 해당 기관은 존중하고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만 규정했다. 국가기관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진실화해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진실화해위는 지금까지 해당 국가기관이 권고사항과 관련해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진행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진실화해위가 작고 한시적 기구이다 보니 국가기관에 조치를 강제할 권한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점이 지적돼 올해 2월 진실화해위 권고가 이뤄지면 해당 국가기관의 장이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이행계획 및 조치 결과를 제출토록 하는 개정법안이 국회서 통과돼 지난달 22일부터 시행됐다. 행안부는 최근 심의위원회를 통해 진실화해위의 권고 사항 이행에 대한 내부 지침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없는 '진실위의 시간'…이치근씨, 이달 중 국가 상대 재심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됐지만 진실화해위에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진실화해위의 활동기간은 내년 5월26일 만료된다. 필요시 1년 더 연장 가능하지만 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진실화해위 2023년 상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6월30일 기준 접수된 처리대상 2만146건 가운데 7330건이 처리 완료됐다.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처리율이 36.4%에 불과한 것이다.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지난 5월 기자간담회를 통해 1년 연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내년도 예산내역을 보면 의지가 불명확하다. 내년도 진실화해위 운영 관련 예산은 올해 대비 반토막 난 약 34억2900만원으로 편성됐다. 특히 '진실규명 공동수행' 부문 예산은 15억원에서 5억원으로 대폭 줄었다.
결국 이씨는 이달 중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신청하기로 했다. 60이 넘은 나이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지만 어떻게든 결론을 보겠다는 것이다. 이씨는 "국가가 나의 명예를 되찾으라고 결정 내린지 수개월이 넘었는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이제라도 국가가 저질렀던 폭력을 바로 잡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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