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카톡!" 지난 1일 새벽 2시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댔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카오톡 오픈채팅 '분노방'에 밤늦게까지 접속해 있었다. 채팅방에서는 "진상 손님에게 욕을 먹었다" "상사가 갑질을 한다" "살이 쪘는데 다이어트가 안 된다" 등 다양한 대화가 오갔다. 각기 다른 주제이지만 공통점은 모두 화가 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일명 '분노방'이다.
이 분노방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로지 화만 내기 위해 모인 채팅방이다. 화를 내기 위해선 규칙이 있다. 반드시 닉네임을 '화난사람'으로 통일해 익명성을 지녀야 한다. 절대 어쭙잖은 충고나 핀잔을 줘서 분노방 사람끼리 싸워선 안 된다. 실제로 분노방 사람들은 통일된 닉네임을 달고 화를 내지만 서로에겐 날 선 말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나지만 풀 데 없는 현대인들이 이 같은 분노방을 찾고 있다. 5일 기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분노'로 검색하면 오직 분노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채팅방이 30개 이상 생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노 주제는 한정돼 있지 않다. 일하면서 만난 진상 손님, 땀 냄새 나는 직장동료, 눈 뜨기 힘든 아침 등 분노하는 주제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자주 반복되고 진지한 대화 주제는 '가족'과 '불평등', 그리고 '외로움'이다. 이날도 한 '화난사람'이 "가족들이 나 몰래 외식을 하고 왔다"고 하자 사람들은 "부모님이 언니한테만 고기를 사준 적 있다" "아버지에게 맞은 적 있다" 등 경험담을 내놓았다. "좋은 곳에서 태어났으면 힘들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부유하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지만 가난하면 화목하기 어렵다" 등 불평등한 현실에 불평하기도 했다.
이모씨(36·여)도 비슷한 이유로 분노방을 찾았다. 이씨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가족이다. 어릴 적부터 친오빠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은 남자가 우선이라며 오빠 편을 들었다. 그때부터 이씨는 부모님과의 대화를 포기했다. 하지만 주변에 이런 사실을 말하기는 눈치가 보였다. 지난 8월 처음 접한 분노방은 남에게 상처받지 않고 분노를 풀 수 있는 곳이었다. 이씨는 "주변 사람들은 당장 불편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을 수 있다"며 "내 말에 사람들이 상처받은 기억도 있기에 분노를 풀려고 분노방을 찾았다"고 말했다.
분노방 접속자들은 이런 대화가 심리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씨는 "분노방 사람들이 답변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괜찮다"며 "대나무숲에 고민을 소리 지르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분노방에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다"며 "이렇게라도 소통해서 분을 풀지 않으면 나도 흉기 난동이라도 벌이고 싶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분노 채팅방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여행지 등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에서 만난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건 심리적 위안으로 이어진다"며 "분노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순 없겠지만 누군가 내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효과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황서율 기자 chest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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