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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매일 밤마다…남편이 잠들면, 공포가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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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선 감독 영화 '잠' 행복한 신혼 부부에게 찾아온 위기
남편의 위험한 수면장애, 수면 클리닉 찾아 치료하지만…
증상 쉽게 호전되지 않고 아내 불안·공포는 갈수록 커져
몽유병의 잠재된 파괴성 주목, 불안 커질수록 교조주의적 집착

인간은 수면으로 에너지를 충전한다. 이때 장애에 부딪히면 생활이 피폐해진다. 때로는 타인도 쇠약하게 한다. 몽유병이 대표적 예다. 수면 중에 복잡한 신체활동을 하거나 의미 없는 말을 하는 질병이다. 당사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꿈꾸지 않았으므로 정신적 경험이 전혀 없다. 수면과 각성 사이에 갇혀 깨어 있는 것도 잠든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의식 상태에 놓인다. 혼란 속에서 뇌는 대체로 익숙한 행동을 일으킨다. 일어나서 배회하거나 옷을 입는 행위 등이다. 이따금 범죄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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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니스 파크스는 1987년 스물세 살이었다. 아내, 생후 5개월 딸과 함께 토론토에 거주했다. 그는 무직 상태에서 도박 빚을 지고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폭력적 성향은 없었다. 장모가 평소 '점잖은 거인(신장 190㎝·몸무게 102㎏)'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해 5월 23일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파크스는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오전 1시 30분경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자가용에 올라탔다. 바로 시동을 켜고 약 23㎞를 달려 처가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부엌에서 칼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장모를 찔러 죽였고, 똑같이 장인을 공격하고 목을 졸랐다. 장인은 정신을 잃었으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파크스는 자가용을 타고 돌아가면서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곧장 경찰서로 가서 자백했다. "제가 사람을 죽인 듯해요. 제 손으로요." 파크스는 살인 과정을 흐릿하게 단편적으로 기억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앓아온 몽유병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살해 동기를 찾지 못한 변호인단도 범죄 당시 수면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자각할 수 없던 상황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항변했다. 배심원단은 이듬해 5월 25일 무죄 평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어진 비슷한 사건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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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스는 지금도 범죄 용의자라는 시선을 받으며 살아간다. 시간이 더 흘러도 혐의를 벗지 못할 것이다. 유재선 감독의 영화 '잠'은 진위에 관심이 없다. 파크스로 검증된 몽유병의 잠재된 파괴성에만 주목한다. 자상하고 따뜻한 성격의 현수(이선균)는 자다가 이상 행동을 보인다. 벌떡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누가 들어왔어"라고 말하고, 오른쪽 뺨을 상처가 날 정도로 마구 긁어댄다. 냉장고에서 날생선을 꺼내어 씹어먹기도 한다. 아내 수진(정유미)은 혼란에 빠진다. 임신까지 한 터라 남편의 모든 행동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그렇다고 물러서진 않는다. 가훈대로 행동하고 생활하는 사람이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초기 대응은 합리적이다. 수면 클리닉을 찾아간다. 드러난 병명은 '렘(REM)수면 행동 장애.' 의사는 자세하게 설명한다. "보통 신경세포가 화학적 불균형 상태일 때 발생하는데, 말은 거창하지만 생각보다 흔합니다. 얼굴을 긁는다든지 팔다리를 막 휘두른다든지…." "똑같아요, 완전. 고칠 수 있는 거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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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현수는 최악의 사태를 우려해 효과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수진의 '함께 극복해야'한다는 신념에 부딪혀 물러선다. "수진아, 여기. 예스고시원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며칠 전에 가봤거든? 월 45만 원. 여기서 5분도 안 걸려. 괜찮지?" "뭐가 괜찮아?" "나 당분간 밖에서 잘게." "싫어." "아니, 집에 있으면 좀 불안하니까. 이렇게 하면 쉽게 해결되잖아." "문제가 생기면 함께 극복하는 게 부부야. (…)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 돼, 부부는."


유 감독은 수면 클리닉 신에서도 남다른 소신을 슬며시 조명한다. 수진이 벽에 붙은 간판 문구를 빤히 바라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린다. '나의 행복은 나의 가족입니다.' 남편이 오른뺨에 밴드를 붙이고 걱정스럽게 의사의 설명을 듣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어떤 것도 의심할 줄 모르는 맹신처럼 나타난다. 순간 이 영화의 화두는 의지와 무관하게 수면에서 비롯되는 행위에서 건전한 양식을 배제한 종교(무속)적 신념으로 옮겨간다. 불안이 커질수록 교조주의적 집착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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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주의나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인생은 하나의 단순한 공식과 같다. 자기가 절대적 진리를 소유했다고 착각해 누군가를 배타적으로 규정한다. 때로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피해도 양산한다. 수진도 다르지 않다. 모호한 감정에 기초해 눈앞의 사실을 깡그리 무시한다. 성급한 확신으로 일관해 진실에서 계속 멀어진다.


밑바탕에는 귀추법이 있다. 주어진 관찰과 사실들로부터 시작해 그럴듯한 설명을 도출하는 방법이다. 엄밀히 따지면 불안정한 추론이다. 믿을 만한 진실을 제공하기보다 그냥 있을 법한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라서 과학적 증명으로서 가치가 미미하다. 우리 일상에서는 흔하게 발견된다. 많은 정보가 손쉽게 제공되면서 다양한 추론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진다.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구분을 포기하는 사람도 적잖다. 마치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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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불안해진 세상에서 우리는 중요하고 어려운 질문에 계속 답해야 한다.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무엇을 믿어야 할까? 완벽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과학이 있고, 그것은 영리한 방법과 이론, 아이디어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다.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자잘한 생각들보다 위대하다. 설사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도 항상 옳으며, 우리가 공동으로 신뢰하는 토대가 된다. 깨어 있는 지식이므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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