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플러스 출신 칼 페이의 '낫씽'
스마트폰 시장서 초기 흥행 성공
디자인·정체성·기술…페이의 전략
애플-삼성 장악 구도 변동 가능할까
스마트폰은 신생 기업의 무덤입니다. 애플, 삼성전자 등 쟁쟁한 대기업이 이미 시장 대부분을 장악한 데다, 완제품 제조와 부품 공급망 관리 난도도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올해 기준 업력 3년밖에 안 된 스타트업 '낫씽(Nothing)'은 용감하게도(혹은 무모하게도) 이런 스마트폰 시장에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벌써 2세대 제품까지 런칭한 데다, 추가 투자금도 수월하게 확보했지요. 스타트업에는 너무나 가혹한 이 시장에서 낫씽이 살아남은 비결은 무엇일까요.
中 원플러스 출신 칼 페이가 이끄는 낫씽
낫씽은 2020년 영국 런던에 설립된 전자기기 제조업체입니다. 중국계 스웨덴 사업가이자 스마트폰 업계 베테랑인 칼 페이가 창업했습니다. 낫씽 창업 이전엔 페이는 중국의 중저가 스마트폰 브랜드 '원플러스'에서 마케팅과 세일즈를 담당했습니다.
낫씽 이전에도 스마트폰 시장에 출사표를 낸 소기업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스케일 업(기업 규모 증대)에 실패하거나, 쌓이는 채무를 해소하지 못하고 사업을 철수했습니다. 대담한 디자인의 전자기기를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발뮤다'도 최근 스마트폰 사업을 중단했지요.
낫씽이 첫 스마트폰 제품 '폰 1'을 계획하던 2020년에는 운조차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를 뒤흔들었고, 여러 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아무런 판매 실적도 없는 스타트업 제품 위탁생산을 맡아 줄 기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엔지니어 열댓 명이 밤새 가며 만든 첫 번째 폰
낫씽의 첫 번째 휴대폰은 고작 열댓명의 엔지니어들이 밤낮없이 매달려 완성한 결과였다. 사진은 위탁생산 공장에서 제조 과정을 감독하고 있는 낫씽 직원 모습. [이미지출처=낫씽 유튜브]
원본보기 아이콘페이는 올해 초 한 외신과 인터뷰에서 폰 1의 제조 과정에서 맞닥뜨린 도전을 상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폰 1을 만들 때 낫씽의 런던 본사에는 단 5명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밤낮없이 일하며 낫씽 폰의 운영체제(OS)를 개발했고, 나머지 인원은 런던과 중국 공장 사이를 오가며 스마트폰 제조의 모든 과정을 직접 감독했습니다.
열댓 명 남짓한 개발 인원의 피땀 어린 노고로 탄생한 폰 1은 예상외로 호평을 받게 됩니다. 휴대폰 뒷면을 LED로 장식한 일명 '글리프 인터페이스', 의외로 나쁘지 않은 소프트웨어 최적화,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페이에 따르면 폰 1의 판매고는 현재까지 대략 100만대 이상입니다.
한 번에 수억대 이상 팔리는 애플, 삼성의 제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가깝지만, 소규모 스타트업에는 고무적인 첫 실적입니다. 이 실적을 바탕으로 낫씽은 신뢰할 수 있는 위탁생산 파트너들을 모집할 수 있었고, 구글 벤처 등 유명한 투자사로부터 1000억원 넘는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했으며, 무엇보다도 실력 있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을 영입할 수 있었습니다.
브랜드 각인·정체성 확립·핵심 기술…페이가 노리는 로드맵
스마트폰 시장은 신생 기업에게 가혹합니다. 위탁생산 기업은 소기업과 계약을 맺지 않고,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관리하고 만드는 작업은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들을 요구하며, 소비자들도 검증 안 된 브랜드에는 지갑을 열지 않지요. 이 때문에 발뮤다 등 다른 기업들이 스마트폰 시장의 문턱에서부터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스타트업이 실패한 '초기 런칭'에서 낫씽의 폰 1은 성공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독특한 디자인이 중요했습니다. 폰 1은 마치 속이 들여다보이는 듯한 투명한 외관, LED가 번쩍거리는 글리프 인터페이스로 유명합니다. 두 요소는 사실 휴대폰의 기능이나 편의성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기믹'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에 질려 있던 일부 소비자는 흔쾌히 폰 1을 구매했습니다.
폰 1의 튀는 디자인은 의도된 요소입니다. 원플러스에서 10년 넘게 경험을 쌓은 페이는 일반적인 접근법으로는 애플과 삼성이 장악한 시장에 '안착'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존 스마트폰과는 아예 다른 디자인과 기능을 채용한 제품으로 '고관여 소비자(시장과 개별 브랜드에 깊은 관심을 두는 소비자 유형)'를 먼저 끌어들이는 전략을 취한 겁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낫씽의 두 번째 제품들입니다. 낫씽은 폰 1 외에도 '이어 1'이라는 투명한 블루투스 이어폰을 만들었는데, 두 번째 제품인 '이어 2'는 전작과 거의 완전히 동일한 형상을 가집니다. 대신 이전 제품에는 디자인에 역량을 쏟아부었다면, 두 번째 제품부터는 미흡했던 성능 개선과 '사용자 경험 증대'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또한 페이가 추구하는 로드맵의 일환입니다. 지난 3월 미 경제 매체 '포브스'와 인터뷰에서 페이는 "제품의 외관은 기업의 정체성"이라며 "사람들이 브랜드 로고가 아닌 제품의 형태를 보고 회사 이름을 인지하는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첫 번째 제품이 독특한 디자인을 통해 브랜드를 소비자의 뇌리에 새기는 단계라면, 두 번째 제품부터는 동일한 디자인과 성능 증대로 '브랜드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단계라는 겁니다. 훗날 모든 소비자가 낫씽의 제품을 알아보고, 낫씽 브랜드에 충분한 신뢰를 주게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폰 1과 거의 비슷한 디자인을 보유했지만, 성능과 여러 기능을 보충한 폰 2도 두 번째 단계의 로드맵에 충실한 제품인 셈입니다.
스마트폰 시장 새 도전자 될 수 있을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단계는 페이가 해당 인터뷰에서 언급한 세 번째 단계입니다. 페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디자인만을 고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대신 "핵심 기술(Core technology)"이 중요해진다고 언급했습니다.
핵심 기술은 현재 스마트폰 시장 최대치의 점유율을 달성한 애플과 삼성이 갖춘 '경쟁 우위'를 뜻합니다. 흔히 모트(MOAT·해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낫씽처럼 위탁생산 위주로 제품을 생산하는 애플은 기업 자체 고유 기술을 갖춘 회사로 유명합니다.
자신만의 운영체제, 자신만의 프로세서, 심지어 디스플레이 기술까지 자체 표준을 준비 중인 기업입니다. 애플은 고유 기술 덕분에 경쟁사와 차원이 다른 기기 성능을 손에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소비자를 애플 제품 생태계 안에 가두는 폐쇄형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삼성의 핵심 기술은 전통적인 수직 계열화입니다. 삼성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스마트폰 제작에 필요한 거의 모든 부품을 직접 제조하며, 최종 조립도 스스로 합니다. 경쟁사 대비 막강한 비용 우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부품 혁신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용이합니다.
반면 낫씽은 이제 막 2단계 로드맵을 밟고 있는 기업입니다. 애플이나 삼성 같은 '핵심 기술'에 투자하는 단계에 진입하려면 여전히 먼 길이 남아있을 겁니다. 또 기술력은 애플이, 공급망은 삼성이 장악한 스마트폰 시장에 과연 어떤 핵심 기술의 틈새가 남아있는지도 미지수입니다.
낫씽의 기업 모토는 '소비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처럼 느껴지도록 기술과 인간의 장벽을 없애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낫씽이 브랜드 정체성을 확고히 설립한 뒤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면 향해야 할 기업 비전입니다. 수년간 아무런 변동도 없었던 스마트폰 시장에 갑자기 등장한 새 도전자가 과연 유의미한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입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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