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 대통령에 재의요구 건의
16일 국무회의…간호계 반발 불 보듯
정치권 책임론…보건의료계 갈등 키워
당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간호법 제정안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공식적으로 건의함에 따라 간호계의 거센 반발이 불가피해졌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현 간호법안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게 된다.
2023 국제간호사의 날을 맞은 1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서 열린 기념 축하 한마당에 참석한 간호사들이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며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윤동주 기자 doso7@
간호법 제정 과정은 그간 보건의료 직역 갈등으로 번졌고, 여야는 중재 노력보다는 정쟁 사안으로 삼으며 국민 건강을 위해 힘써야 할 보건의료계를 양분시켰다. 간호법 제정이 어떻게 결론이 나더라도 이번 사태는 보건의료계가 정치권에 휘둘린 최악의 사례로 남을 전망이다.
예견된 당정 거부권 건의
14일 당정은 고위당정협의회를 열고 윤 대통령에게 간호법 제정안과 관련해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오는 16일 열릴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 건을 심의·의결할 것으로 보인다.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현행 의료체계에서 간호사만 분리할 경우 의료 현장에서 직역 간 신뢰 협업이 깨져 갈등이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간호법이 공표될 경우 정부가 민생 현장에서 갈등을 방치하는 나쁜 선례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건의 이유를 설명했다.
당정의 이 같은 결정은 어느 정도 예견됐다는 평가다. 간호법 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당시 여당 의원들은 퇴장한 가운데 야당 주도로 의결이 이뤄졌고, 간호법에 반대하는 대한의사협회·대한간호조무사협회 등 13개 보건의료 직역 단체가 참여한 '보건복지의료연대'는 17일 총파업 계획을 밝히는 등 정부·여당을 지속해서 압박했다.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간호법이 제정되면 보건의료 직역 간 협업 저해가 우려되고,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줄곧 표명했다.
간호계 강력 반발…사상 첫 파업 나서나
이와 달리 간호계는 현 간호법 제정안이 충분한 논의를 거쳤고, 여야 가릴 것 없이 추진했던 정책이라며 간호법 공포를 요구해왔다. 최근 김영경 대한간호협회 회장 등 대표자들이 단식 농성에 돌입하며 윤 대통령의 간호법 공포를 촉구하는 중이었다. 김 회장은 지난 12일 열린 '국제 간호사의 날 기념 축하 한마당'에서 "간호법은 다른 보건의료 직역과의 협력을 결코 저해하지 않고, 법적으로나 절차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4차례에 걸친 강도 높은 법안심사 끝에 조정안을 마련했음에도 정부와 여당은 간호법안이 본회의에 부의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문제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유력해지면서 간호계가 집단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간협은 지난 8일부터 회원들을 대상으로 '간호사 단체행동' 설문조사를 벌이고 있는데, 중간집계 결과 98.4%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 간호사 단체행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간협은 의견조사에 앞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한 집단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만큼 더욱 적극적인 실력 행사가 불가피해졌다. 간호계 내부에서는 사상 최초의 집단 파업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간호계가 총파업에 돌입한다면 의료 현장의 극심한 혼란이 예상된다. 대한간호협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를 비롯해 병원간호사회 등 탄탄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고, 간호법 제정이 간호계 최대 숙원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참여율이 상당할 것으로 관측된다. 한 보건의료계 관계자는 "간호사 파업은 일부 의원급 의료기관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의료기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중환자실이나 응급실 등 필수의료 인력은 남는다 해도 외래 진료부터 일반 병실까지 마비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치권이 키운 간호법 갈등
이번 간호법 사태를 둘러싸고 가장 아쉬운 점은 갈등을 중재해야 할 정치권이 정쟁 사안으로 삼아 극한의 대립을 유발했다는 데 있다. 간호사 처우 개선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여야가 추진하려던 공통 정책이었다. 실제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간호법안은 여야를 가리지 않았다. 현재도 간호사 처우 개선 자체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보건의료 직역 단체는 없다. 그러나 정치권은 직역 갈등을 중재하는 능력을 보여주기는커녕 '내 편, 네 편'으로 나뉘어 제 갈 길을 갔다. 야당은 "충분히 논의했다"는 이유로 입법을 강행했고, 여당은 "입법 폭주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간호계와 대립각을 세웠다.
실제 당정은 간호계 설득 과정에서 간호사 처우 개선을 '당근'으로 제시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지난달 말 복지부는 간호법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전격적인 '간호인력 종합 지원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구체적인 재정지원 방안 등이 빠져 선언적 의미에 그쳤다는 평을 받았다. 보건의료노조는 "방향만 있고 구체적 알맹이는 보이지 않는다"며 "현장 간호사들에게 실질적인 보상과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구체적 실행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간협 또한 환영하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간호법 제정을 가로막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해 그 의미를 퇴색시키지 말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간호사 지원 종합대책은 간호법 제정을 막으려는 의도였다는 게 드러난 셈이 됐다.
이런 가운데 윤 대통령의 간호법 거부권 행사 시 '출구전략'에도 이목이 쏠린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앞서 "의료 협업체계를 복원시키기 위해서라도 양당 간 새로운 합의에 이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면서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고 줄여나가는 게 본래 입법의 기능"이라고 말했다. 이에 보다 진전된 처우개선 논의나 앞서 당정이 중재안으로 제시한 이른바 '간호사 처우개선법' 입법 등이 거론된다. 다만 이미 간호계에서 반발했던 전력이 있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관주 기자 leekj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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