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개인전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 = 학고재는 박종규 작가의 개인전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를 29일까지 개최한다.
잡음 등으로 번역되는 노이즈는 통상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작가는 질서 있게 정돈한 노이즈를 통해 새로운 발견의 메시지를 전한다. 작가는 노이즈에 대해 "부정적 가치와 반대로 오히려 아름다운 형식"이자 컴퓨터가 완전무결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노이즈의 세계를 표현한 회화, 영상, 조각 40점을 선보인다.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 아닌 비정형 캔버스를 사용해 평면 작업이지만 각도에 따라 입체처럼 보이는 작업도 공개해 눈길을 끈다. 전시 대표작은 '수직적 시간' 연작으로 컴퓨터 화면에 등장한 노이즈를 잡아내 길게 늘어뜨리는 방식으로 형태를 변형해 화폭에 담은 작품들이다. 작가는 노이즈의 복잡한 모양 그대로 시트지를 찍어낸 뒤 이를 캔버스에 붙여 색칠하고 다시 시트지를 떼어내는 방식으로 캔버스를 노이즈의 매끈한 선으로 채웠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폭풍에서 영감을 받은 분홍색 작품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은 원래 영상으로 제작해 지난해 2월 대구 동성로의 전광판에서 상영했는데, 이때 기계 오류가 발생하면서 화면이 분홍빛 노이즈로 물들자 그 모습을 그대로 화폭으로 옮겨왔다. 작가는 "내가 선택하는 순간 이것이 노이즈가 아니고, 선택하지 않으면 노이즈가 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며 "정치, 사회 등 여러 문제에 있어 진실과 거짓을 우리가 알고있는 만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챗GPT를 위시한 인공지능(AI)의 대두로 인간의 영역이 위협받는 시대, 작가는 그럼에도 결국 노이즈, 나아가 사물의 의미를 판단하는 주체는 인간일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전시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정미혜 개인전 '민화, 정원에 서다' = 한국화가 정미혜의 개인전이 17일까지 운현궁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민화, 정원에 서다'라는 주제로 작가의 공모전 수상작과 단체전 출품작들, 그리고 신작 '아버지의 정원' 등 그간 작가의 작업 연대기를 한 자리에 선보인다.
작가는 오랜 기간 미술학원 운영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전통민화 작업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전업작가로 본인이 아이들을 키우며 사용했던 가구와 소품들,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향수가 남아있는 소품들을 그리며 전통민화에서 창작민화로 저변을 넓히고 있다. 특히 여성으로서의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며 어머니로 살아오면서 포기해야만 했던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등을 작품 속 여인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천착하고 있다.
작가의 최근작들은 이러한 여성들을 꽃들이 가득한 '정원'이라는 공간에 배치해 초현실적 분위기와 생명력이 느껴지는 작품 세계를 표현한다. 이는 작가가 어릴 적 살던 집의 넓은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정원은 작가에게 자매들과 부모님이 함께 숨쉬던 공간이자 어릴 적 추억이 담겨있는 대상으로, 그 자체에서 오는 생명력과 더불어 그 시절 꽃과 정원들에 대한 추억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담은 전통 민화 작품과 더불어, 봄에 어울리는 다채로운 꽃들과 여러 여인들의 모습을 전통민화, 창작민화와 한국화까지 다양한 화풍으로 확장된다. 전시는 17일까지, 서울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기획전시실.
▲이우환 개인전 'Lee Ufan' = "내 작품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독특한 신체성을 띠고 있으며, 대상 그 자체도 아니고 정보 그 자체도 아닌, 이쪽과 저쪽이 보이게끔 열린 문, 즉 매개항이다. 다시 말하면 나와 타자가,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장소가 작품이고 이것은 새로운 리얼리티의 제시다."
국제갤러리는 5월 28일까지 이우환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2009년 이후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두 번째 전시이자,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 설립(2015)을 제외하면 국내 관람객들이 12년 만에 맞는 작가의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는 이우환의 198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아우르는 조각 6점과 드로잉 4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의 메인 무대를 장악하는 그의 조각들은, 그가 1956년에 일본으로 이주해 전위적인 미술운동인 모노하를 주도하기 시작했던 1968년과 동일한 연도에 처음 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 꾸준히 작업을 이어 온 '관계항(Relatum)' 연작의 연장선에 있다.
작가는 무(無)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의 표상으로서의 표현을 만들고, 그것을 대상화하는 대신 현실과 맞물리는 현상의 파편으로서의 작업을 보여준다. 또 타자 또는 세계와의 교류에 열려 있는 표현으로서의 작업을 만들어낸다. 그는 작품이 끊임없이 현실 또는 일상과 관계 맺도록 하기 위해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 공간과 같은 익명의 뉴트럴한 장소에 간결하고 절제된 미니멀한 형태의 메타포를 만든다.
자신의 모든 조각들을 ‘관계항(relatum)’이라 제목 짓고 여기에 종종 부제를 붙이는 작가는 이때 붙이는 부제에 대해 가능한 연상을 도울 뿐 확고한 해석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규정지을 수 있는 ‘관계’ 대신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를 의미하는 ‘관계항’을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기저에 작품 개별 요소들이 끊임없이 맥락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관계에 놓이도록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자연을 상징하는 돌, 그리고 산업 사회를 대표하는 강철판 등 작업의 요소들과 함께 하나의 ‘관계항’으로서 작품 공간에 직접 개입하게 되는 관객은 두 사물의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침묵 중에 진행되는 대화를 명상하듯 관찰하며 자아와 타자의 공생(co-presence)을 생각하게 된다.
“돌은 시간의 덩어리다. 지구보다 오래된 것이다. 돌에서 추출된 것이 철판이다. 그러니까 돌과 철판은 서로 형제 관계인 것이다. 돌과 철판의 만남, 문명과 자연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 내 작품의 발상이다.” 두 요소의 공생에 대한 작가 의견을 곱씹어보면 작품에는 공백이 있고, 공명이 있고, 상호 충돌하여 발생하는 에너지가 있다. 작가는 내부와 외부가 교통하는 가변성의 세계, 즉 ‘무한’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관객에게 거대서사이자 이론 그 자체인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선사한다. 전시는 5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제갤러리.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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