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썬' 흐릿한 아빠와의 여행 추억
아빠보다 자신과 또래에게 더 관심 기울인 딸
아빠와 똑같은 나이가 돼서야 숨은 노력 깨달아
영화 '애프터썬'에서 소피(프랭키 코리오)는 열한 살 때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함께한 튀르키예 여행을 떠올린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캠코더에 찍힌 영상을 길잡이 삼아 실체에 다가가려 한다. 아빠는 이혼하고 혼자 지냈다. 늘 밝게 웃어줬으나 어딘가 모르게 병약하고 창백했다. 당시 소피는 궁금하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 자신이나 낯선 언니·오빠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빠가 아픈 모습을 애써 감추기도 했다. 시종일관 눈높이를 맞추며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
"아빠한테는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 알지? 이다음에 나이가 들어서 어떤 파티에 가든지, 어떤 남자를 만나든, 약을 하더라도…." "아빠!" "진심이야, 소피. 아빠도 다 해본 거니까 뭐든 얘기해도 괜찮아." "응, 그런 짓 안 할 거지만." "그래, 알겠어."
다정다감한 얼굴은 한순간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관계는 이음새 없는 평탄한 콘크리트 고속도로가 아니다. 작은 돌 하나하나, 짧은 시간 한 조각 한 조각이 모여 만들어진 자갈길과 같다. 아이들은 그 자리에 있는 아빠를 필요로 한다. 감상적인 소망이 아니다. 킴벌리 레이첼 앤 리어리 박사는 사춘기 딸에게 미치는 아빠의 영향에 관한 분석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 논문에 따르면 사춘기에 접어든 딸들은 관계가 소원하거나 관심을 받지 못하더라도 아빠를 실제보다 더 크게 생각한다. 자신들의 삶에 상당한 심리적 존재감을 지닌 사람으로 여긴다.
캘럼은 이혼과 아픔으로 지속적인 울타리가 돼줄 수 없다. 그래서 더 큰 심적 안도와 위안을 제공해 크나큰 변화를 유도한다. 핵심은 관계 맺음이다. 그는 소피의 문제를 고치거나 풀어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해는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아이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야 가능해진다. 해답을 내놓고 결론을 향해 내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아이의 불안감이 무엇인지 살피며 함께 가는 여행이다.
심리학자 케빈 리먼은 저서 '딸이 아빠를 필요로 할 때'에 "내 몸속의 남성 호르몬이 빨리 결론을 내리라고 아무리 아우성을 치고 다그쳐도 아이는 내가 그 과정에 집중해주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아가야, 해답은 간단하단다'라는 말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공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가야, 그 문제로 정말 속이 상한 것 같구나. 아빠에게 한번 말해보지 않을래?'"
소피는 그때의 아빠와 똑같은 나이가 돼서야 진심을 이해하려 한다. 아빠가 남몰래 울부짖었을 모습을 상상하며 놀라운 헌신과 일관성을 깨닫는다. 주워 담을 파편이 부족해 실체에 다가갈 수는 없다. 꿈속에서 만나는 얼굴조차 웃는지 우는지 헷갈린다. 하지만 아빠의 따스했던 품을 기억하며 잊었던 동력을 발견한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데이비드 보위가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를 부르며 그토록 강조했던 '사랑'이다.
"사랑, 사랑, 사랑 / 억압 속에서 망가진 우리를 보며 광기는 웃고 있어 / 우리 자신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줄 수는 없을까? / 우리 사랑에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 / 왜 우린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줄 수 없을까 / 왜냐면 사랑은 이제 너무 낡은 표현이니까 /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게 하고 / 또 사랑은 우리가 자신을 돌보는 방식까지 바꾸게 하지 / 이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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