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3코스 남원 인월-함양 금계 구간 20km를 걷다-정이 가득한 트레킹
[아시아경제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산촌의 새벽은 민박 할머니가 달그락대며 밥 짓는 소리로 시작됩니다. 장작 쌓인 마당에 서면 능선 위로 여명이 깃들고, 군불 때는 연기와 안개가 뒤섞인 아득한 시간이 찾아듭니다. 남원 인월마을과 매동마을을 잇는 지리산둘레길은 가을 산골 풍경과 촌부의 삶을 만나는 곳입니다. 숲길을 걷다가 감이 주렁주렁 달린 마을 담장을 지나고, 쉼터에선 입맛 돋는 파전 한 젓가락에도 신이 납니다. 둘레길을 걷는 내내 인사 한마디에 마을 주민들은 수확한 과일이나 채소를 양손가득 담아주기도 합니다. 정이 가득한 소박한 산골 여행에서 마음은 부자가 됩니다.
지리산둘레길 걷기가 처음이라면 남원시 인월면에 있는 인월센터에서 시작하면 된다. 센터는 인월장터로에서 구인월교를 건너기 전, 왼쪽으로 200m 가면 나온다. 센터에는 구간 지도와 숙박 정보, 주변 관광지 안내 리플릿 등이 있다. 때론 함께 할 길동무도 만난다.
본격적으로 지리산 둘레길에 나선다. 구인월교를 건너 좌회전하면 인월-금계 구간(3코스. 20.5km) 여정이 시작된다. 1시간에 대략 2.5km 이동하니 총 8시간 코스다. 점심나절에 첫발을 뗐다면 매동마을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 날 금계까지 남은 구간을 걸으면 무리가 없다. 해가 짧아지는 시기이므로 늦어도 오후 1시에는 출발해야한다.
길은 남천(람천) 따라 흐르다 논둑과 마을을 만나고, 숲과 고개 넘어 다시 마을과 이어진다. 남원 인월에서 함양 금계까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이 구간은 지리산둘레길이 시범 개통한 사연 깊은 길이다. 인월면 소재지에서는 제법 큰 오일장이 섰고, 마을 주민은 신작로가 생기기 전만 해도 옛길(현 지리산둘레길)을 걸어 인월장에 오갔다.
골목마다 벽화가 볼 만한 월평마을은 달이 뜨면 보이는 언덕이라는 뜻이고, 달오름마을로도 불린다. 월평마을에서 매동마을까지 느리게 걸어 4시간 남짓 걸린다. 지리산을 병풍 삼은 산골 마을과 숲길, 냇물, 고개가 둘레길에 담긴다. 월평마을 앞 남천과 논둑 따라 시작된 길은 중군마을로 이어진다. 중군마을은 임진왜란 때 전군과 중군, 후군 가운데 중군 부대가 주둔한 곳이다. 담장 너머로 감이 익고, 마늘과 고추를 말리고, 깨를 터는 일상이 펼쳐진다.
중군마을을 지나 본격적으로 숲길이 시작된다. 갈림길에서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택하면 좁고 고즈넉한 숲길이 그늘을 만든다. 길은 외딴 암자 선화사(옛 황매암)를 거쳐 수성대로 연결된다. 수성대 맑은 물은 중군마을과 장항마을 주민의 식수원으로 쓰인다. 수성대 초입에는 늦가을 풍경을 그림 삼아 잠시 쉬었가 갈 수 있는 쉼터가 있다. 지리산둘레길 인월-금계 구간 곳곳에 쉼터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3~4곳이 명맥을 유지한다. 찾는 사람이 많은 주말이나 공휴일 위주로 문을 열며, 길손에게 부침개와 오미자차, 막걸리 등을 내놓는다.
배너미재를 넘으면 지리산 자락의 탁 트인 정경과 함께 숨찬 숲길이 마무리된다. 숲길 끝자락에 장항마을 당산 소나무가 듬직하게 서 있다. 마을에서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수령이 수백 년에 이르는 당산나무 아래 장항마을은 옛 흙담 길이 고즈넉하다. 마을 너머로 바래봉 능선 자락이 내려앉는다.
둘레길과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흐르던 남천은 만수천을 만나 낙동강까지 흘러든다. 장항마을 장항교를 건너면 나오는 매동마을은 인월-금계 구간 중간 지점의 의미가 짙다. 함양 금계마을까지 오가는 여행자가 매동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마을에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민박이 10여 곳 있다. 둘레길 손님이 찾아들기 전, 매동마을 주요 수입원은 고사리를 재배하고 꿀을 따는 것이었다.
민박 할머니가 차려준 아침상에는 뽕나무 새순, 머위, 장녹나물 등 산나물이 푸짐하다. 인근 산자락에서 봄에 딴 나물을 말렸다가 그때그때 들기름에 무쳐 낸다. 직접 재배해 만든 꽈리고추찜, 고들빼기김치도 향긋하다. 함양 마천에서 50년 전에 시집온 이야기, 시어머니 대신 장터에 가서 들뜬 이야기…. 빛바랜 사진 속에 할머니의 세월이 묻어나고, 얽힌 사연과 미소가 마당을 따사롭게 맴돈다. 하룻밤 묵고 민박을 나설 때, 할머니가 대문 밖까지 배웅하며 사탕 한 줌 쥐여주신다. 알뜰한 걷기 여행을 하는데, 마음은 지리산처럼 든든하고 넉넉해진다.
둘레길 이정표에서 슬쩍 벗어난 곳에 볼거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매동마을 인근에 퇴수정(전북문화재자료)이 있다. 조선 후기 선비 박치기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세운 정자로, 누각 가운데 방 한 칸을 들인 구조가 독특하다. 정자 앞으로 바위와 냇물이 아늑하게 어우러진다.
등구재까지 계속되는 지리산둘레길 인월-금계 구간에서는 다시 풍광과 조우한다. 산내면 중황마을과 상황마을 해발 500m에 다랑논이 펼쳐진다. 수확을 마친 다랑논 너머 지리산 능선과 스쳐온 마을이 한눈에 잡힌다. 마지막 쉼터 지나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면 등구재(650m)다. 등구재는 전라도(남원)와 경상도(함양)의 분기점이 되는 고개다. 예전에 주민은 지리산을 곁에 두고 등구재를 넘나들며 경계와 허물없이 지냈다.
옛사람들은 함양에서 오도재, 등구재를 넘어 남원으로 왕래했단다. 이내 창원마을 전경이 펼쳐진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일광욕하는 고추가 보인다. 가을이 마당에 펼쳐지니 넉넉한 수확의 계절을 실감한다.
금계마을을 마지막으로 인월-금계 구간의 목적지에 다다랐다. 20km 남짓 걸었는데 마음이 홀가분하다. 흙길이 더러 시멘트 길로 바뀌었고, 땅거미 지면 겨우 한두 채 불빛이 보일까 말까 하더니, 이제 펜션도 여럿 있다. 외지인은 산 중턱에 그림 같은 집을 마련하려고 부지런히 망치질한다. 그저 사람이 지금보다 조금 더디게 다가서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행메모
△가는길=수도권에서 가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함양IC에서 광주대구 고속도로를 탄다. 지리산IC를 나와 인월면소재지에 있는 둘레길 인월센터로 가면 3코스가 시작된다.
지리산=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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