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의 국내 무대에 팬들 뜨거운 응원전
LPGA 새벽 댓글 생중계…열성팬 해외 직관도
"건강한 팬덤 문화, 골프 대중화에 기여할 것"
[아시아경제 이서희 기자] 이달 초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에서 우승자 박민지(24)보다 더 주목받은 선수가 있다. 1년 만에 국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박성현(29)이다.
박성현은 경기가 치러진 나흘 내내 구름 갤러리를 몰고 다니며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박성현 효과'로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이 열린 경기도 여주 블루헤런CC에는 나흘간 무려 4만 명에 가까운 관중이 몰렸다.
박성현은 국내 골프 선수 중에서도 탄탄한 ‘팬덤’을 가진 선수로 유명하다. 공식 팬클럽인 ‘남달라’의 회원 수는 네이버 카페 9980명, 다음 카페 8300명으로 합계 2만 명에 달한다. 국내 여자 골프 선수 중 최대 규모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3일간 100여명의 신규 회원이 몰리기도 했다. 전문가는 이같은 팬덤이 한국만의 독특한 골프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영국에서 “남달라 파이팅!” 해외 갤러리 사이에서도 화제
지난 8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AIG 위민스 오픈에 출전한 박성현을 응원하기 위해 '남달라' 회원들이 영국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모습. 사진제공=정미숙 매니저
원본보기 아이콘2017년 주 무대를 LPGA로 옮긴 박성현은 그해 우승과 함께 올해의 선수상, 신인상, 상금왕 등을 석권했다. 이후 긴 침체기가 시작됐다. 2020년 어깨 부상을 당하는 불운을 시작으로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톱10에 들지 못했고, 한때 1위였던 세계랭킹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지독한 슬럼프가 이어질 때도 팬들의 응원은 뜨거웠다. 올해 8월엔 ‘남달라’ 회원 6명이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AIG 위민스 오픈에 출전한 박성현을 응원하기 위해 영국 스코틀랜드까지 날아갔다. 박성현의 최종 성적은 공동 28위로 부진했지만, 팬들은 박성현의 이름이 적힌 파란색 티셔츠와 모자, 응원 슬로건을 들고 뜨거운 응원전을 펼치며 경기를 즐겼다.
아이돌 못지않은 팬 문화는 해외 갤러리 사이에서도 ‘진풍경’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1홀 티샷 지점에서 팬들이 선창하는 “남달라 파이팅!” 구호는 ‘남달라’를 상징하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남달라' 회원들에 따르면, 어쩌다 구호를 생략하는 날이면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먼저 다가와 왜 구호를 외치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다.
다채로운 굿즈도 골프장을 찾은 다른 갤러리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박성현 선수의 얼굴을 본 따서 제작한 스티커와 응원 수건, 피켓, 티셔츠 등은 멀리서도 한눈에 남달라 회원임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이들은 자체 제작한 스티커를 티셔츠와 모자 곳곳에 붙이고 돌아다니며 경기를 관람한다. 최근 카페에서 진행된 응원 수건 공동 구매 이벤트엔 팬클럽 회원 850여명이 몰리기도 했다.
정미숙 '남달라' 공식 팬클럽 매니저는 “해외에 가면 해외 갤러리들도 ‘남달라’ 문화를 상당히 흥미롭게 바라본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거나 이것저것 물어보는 분들도 많다”고 전했다.
한국선 새벽 3시까지 ‘댓글 중계창’…팬덤 통해 골프 입문하기도
같은 시각, 한국에선 뜨거운 ‘댓글 중계’가 펼쳐진다. 상위권에 들지 못해 LPGA 중계 카메라에 얼굴이 잘 비치지 않는 박성현을 위해 팬들이 실시간으로 리더보드를 살피며 회원들에게 성적을 공유하는 것. 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가 넘은 야심한 밤이지만, 한번 대회가 열릴 때마다 카페 내 게시물엔 5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린다.
최근엔 연예인 촬영장에서나 볼 법한 커피차가 골프장에 등장해 화제였다. 하이트진로 챔피언십 개막 전날, '남달라' 회원들은 십시일반 모은 운영비로 박성현 선수를 응원하는 뜻을 담아 커피와 간식 500인분을 준비했다. 대회를 준비하는 KLPGA 선수들과 골프장을 찾은 유소년 선수들이 블루헤런 클럽하우스에 등장한 커피차에 모여 함께 간식을 즐겼다. 응원에 힘입은 듯 박성현은 공동 3위로 대회를 마감, 3년 2개월 만에 10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최고 성적을 냈다.
팬클럽 활동을 통해 골프에 입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박성현을 응원하기 위해 골프를 공부하기 시작하거나, 팬클럽에서 진행하는 정기 응원 라운딩에 참여했다가 본격적으로 골프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경우다.
실제로 코로나19 이전까지 ‘남달라’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응원 라운드에 나서 친목을 다졌다. 한번 라운딩할 때마다 참여하는 회원 수는 50명~100명 정도다. 최근 진행된 팬클럽 창립일 겸 박성현 선수 생일 라운딩엔 100여 명이 모여 기념일을 자축했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공을 한 번도 쳐 본 적 없는 회원까지 자연스럽게 골프에 흥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 카페 매니저의 설명이다.
최근엔 40대~50대 여성 중심이었던 팬클럽 회원 구성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대 남성의 유입률이 크게 는 것이다. 정 매니저는 “최근 진행된 카페 창립일 겸 선수님 생일 라운딩에 20대 남성분들이 많이 오셔서 깜짝 놀랐다. 팬들의 나이와 성별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고 말했다.
“에티켓 준수하며 건강한 팬덤 문화 만드는 게 숙제”
팬덤이 커질수록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 최근 ‘갤러리 비매너’ 논란이 불거지면서 골프계 팬덤 문화를 마냥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늘면서다. 실제로 2019년 김비오 선수는 DGB 금융그룹 볼빅 대구·경북 오픈 최종라운드에서 샷 직전 갤러리의 핸드폰 셔터 소리를 참지 못해 손가락 욕을 날렸다가 중징계를 받은 바 있다.
이 때문에 성숙한 팬클럽 문화는 ‘남달라’에게도 고민거리다. 이들은 사진 전담 스태프를 따로 지정하고 내부 수칙을 마련하는 등 갤러리 에티켓을 해치지 않기 위해 각별하게 조심하고 있다. 샷 직전엔 응원 구호 외치지 않기, 홀과 홀 사이를 이동할 때 선수들이 움직이기 전까지 기다리기 등의 주의사항을 경기 일주일 전, 3일 전, 하루 전, 그리고 당일에 카페 회원들에게 재차 공지한다.
골프계 팬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지만, 골프 선수의 팬덤 문화가 골프장 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골프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재근 전 KPGA 위원장은 “선수를 응원하러 경기장을 찾는 갤러리들이 새로운 골프 문화를 선도하는 존재로 떠올랐다”면서 “정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지는 골프 경기의 특성상 단기적으로 잡음이 있을 순 있겠지만, 활발한 팬 문화가 소수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골프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꼭 봐야할 주요뉴스
불닭·김밥이어 또 알아버렸네…해외에서 '뻥' 터...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