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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형의 오독오독] 당신이 나와 같지 않아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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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작가 에세이 '루카치를 읽는밤'

작가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흔을 마녀의 마법 약처럼 진득하게 끓여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

작가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흔을 마녀의 마법 약처럼 진득하게 끓여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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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 다른 사람이어도 거부하지 않아

루카치에 대한 애정, 음식, 영화, 음악에 관한 취향 선한 언어로 소개


태초에 ‘간장 두 종지’라는 칼럼이 있었다. 설문조사를 해본 것도 아니고 학계에서 발표된 연구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지난 10여년간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칼럼은 없으리라 확신한다. 중국집에서 가서 간장 종지를 2인에 1개를 줬다는 이유로 시작해 아우슈비츠의 마지막 소원까지 뻗어가는 이 칼럼은 한 인간의 세계가 얼마나 옹졸하게(본인이 직접 칼럼에 쓴 표현을 인용한다)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지 잘 보여줬던 칼럼이다. 요즘식 표현으로는 옹졸의 멀티유니버스 정도 되시겠다. 이 칼럼의 마력은 보통 "이게 뭔 X소리야"라고 중간에 읽기를 그만두게 하는 기존 유사 칼럼과 달리 끝까지 읽게 한다는 데 있다.

조현 작가가 쓴 에세이 ‘루카치를 읽는 밤’은 정확하게 반대되는 곳에 있는 책이다. 한 인간의 아기자기한 선함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게 소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작가는 본인이 ‘살짝’ 이분법론자라고 말한다. "스티븐 킹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UFO를 본 사람과 그렇지 못 한 사람, 철학자 버클리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혹은 H.P. 러브크래프트를 읽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런 종류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를 적용해 본다고 한다.


"그 사람의 내부에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친밀감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무척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흠뻑 빠져든 다른 것을 그 사람에게도 소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소개팅을 주선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나와 반대편에 있다거나 혹은 모른다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을 항상 중요하게 여긴다. 스티븐 킹을 모른다고 하여 그가 마음의 감옥 속으로 끌고 갈 일은 적어도 없다는 얘기다. 그는 게오르크 루카치라는 -발터 베냐민도 마찬가지다- 교양수업 시절 치를 떨게 했던 그 이름에 대한 거부감을 무장해제 시키며 그의 아름다움을 설파한다. 선함의 멀티유니버스 그 자체다.


작가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흔을 마녀의 마법 약처럼 진득하게 끓여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책장마다 펼쳐지는 그의 어린 시절 추억, 음식 취향, 책에 대한 집착, 영감을 준 음악·영화들을 읽다 보면 그의 취향에 경도된다든가, 권유를 받는다든가 하는 느낌보다는 내 취향을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나에게 인생의 영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리들리 스콧의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를 꼽는다. 물론 너무 훌륭한 영화고 인생의 영화 3~4위쯤에 당연히 들어갈 영화이긴 하다.


하지만 내 1순위는 이 영화를 처음 본 그 이후로 바뀐 적이 없다. 바로 주성치의 1995년 작 ‘서유기 월광보합’과 ‘서유기 선리기연’이다. 여주인공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무언가나, 엔딩곡 ‘일생소애’가 흘러나올 때의 여운을 잊게 해줄 다른 영화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자리에서 이 영화가 최고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나보다(나름 유사 영화학도였으니까). 조현 작가와 루카치를 읽는 밤을 보내고 나서 이제는 용기를 내서 말해야겠다. 사실 남들 눈을 의식해 진짜 취향을 숨겨왔노라고. "야 너두?"


루카치를 읽는밤 / 조현 / 폭스코너 /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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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형 기자 gh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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