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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독재 맞선 '저항시인' 김지하 별세

최종수정 2022.05.09 06:18 기사입력 2022.05.09 05:00

김지하 시인, 투병 중 타계…향년 81세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등 시 발표하며 등단
대표작으로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 산문집 '생명' 등 남겨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 시인이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시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생활을 한 끝에 이날 오후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토지문화재단 관계자가 이날 전했다. 사진은 지난 2014년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견운동 옥션단에서 열린 수묵산수전 '빈 산'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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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삶과 세계는 이제 나에게 쓸쓸하고 외로운, 그러나 빛으로 환한, 그동안 닫혔던 문을 열어주고 있다. 나는 이 문으로 들어가 대립과 투쟁을 넘어선 평화와 상생과 화해와 큰 창조의 사상 및 논리를 거리낌 없이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흰 그늘의 길>(김지하 회고록/학고재, 2003)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五賊) 등 독재 정권 시절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활동하며 고통과 수난의 세월을 겪은 김지하(81·이하 존칭 생략) 시인이 8일 별세했다. 전남 목포 출생인 고인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목포 문학'에 '저녁 이야기'라는 시를 낸 후,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비' 등의 시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등단했다. 아홉 살 때 한국전쟁을 맞은 그의 본명은 영일(永一)이다. 지하(芝河)는 지하(地下)에서 따온 필명으로 알려졌다.

그의 회고록에서도 엿볼 수 있듯 김지하는 진보와 보수, 저마다의 사상과 이념으로 극단적으로 갈린 한국 사회에 화해라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던졌다. 그러다 보니 이념 논쟁에도 곧 잘 휘말렸다.


특히 고인이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 내용은 진보 진영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글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소름 끼치는 의사 굿을 당장 걷어치워라"라고 말했다.


당시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자 이에 분노하는 대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고인은 생명 사상을 강조하면서 목숨을 버리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외면했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1960년대 독재 정권을 향해 펜을 들어 저항했던 시인이 변절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 칼럼으로 고인은 결국 보수와 진보 모든 진영에서 비판받는 일종의 논쟁적 인물로 굳어졌다.

고(故) 김지하 시인의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사진=조선일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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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보수 모두에 쓴소리…그는 타고난 반골일까


반골(反骨)이란, 뼈가 거꾸로 된 것을 말한다. 결국 어떤 명령이나 권위에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기질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지하 본인은 스스로 자신은 반골 기질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2009년 5월29일 전북일보에 기고한 칼럼 일부를 보자.


그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반골은 아니다. 타고난 기질은 도리어 매우 유순하고 착했다. 오죽하면 어릴 적 별명이 '울냄이', '찔찔이','징게맹게', '순둥이' 따위였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시절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내가 머저리에서 저 유명한 반골 김지하로 변한 것은 대학생 때다. 대학생 때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있었고 숨어 다니던 내가 피신처에서 들은 피투성이 소식 때문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실제 그는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고 이듬해 4·19 혁명에 참여한다. 이어 민주화 운동에 전면으로 나선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서울대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등에서 활동했다.


반골 기질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회적 물줄기가 휘몰아치는 큰 사건 고비마다 쓴 소리를 내뱉던 김지하는 필화사건에 연루, 고초를 겪는다. 언론과 문인 통제를 강화하던 1960년대 '이영희필화사건', '분지필화사건' 등 여러 필화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다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던 김지하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이른바 '오적(五賊)'이라 지칭하며, 그 치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을 1970년 5월 '사상계'를 통해서 발표했다. 김지하를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 1970년대 대표적인 필화사건인 '오적필화사건(五賊筆禍事件)'의 시작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문헌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는 '오적'의 유포를 막을 요량으로 '사상계'의 시판을 중단했다.


당장 6월2일 새벽 1시50분께 중앙정보부와 종로경찰서 요원들에 의해 '민주전선'10만여 부가 압수됐다. 이어 6월20일 김지하와 함께 '사상계' 부완혁 대표, 김승균 편집장, '민주전선' 김용성 출판국장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시 '오적'이 "계급의식을 조성하고 북한의 선전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이유로 유죄를 구형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시인 김지하는 피고인으로 재판에 넘겨진다.


김지하는 법정에서 "담시 '오적' 은 일부 몰지각한 부정 부패자와 이의 단속에 나선 경찰 비위에 대한 권선징악을 판소리 형식으로 풍자한 것이며 계급의식을 고취시킬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1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과 사회 지배층의 부정·부패를 노골적으로 꼬집은 시인과 이 시를 활용하는 야당을 박정희 정부는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 김지하는 법정에서 재판부와 자신을 기소한 검찰을 향해 단 몇마디로 자신을 변호한다. 당시 김지하를 변호한 '1세대 인권변호사' 고(故) 한승헌 변호사가 한겨레에 2009년 1월29일 쓴 칼럼을 보면 김 시인은 훗날, 그 재판을 회고하는 글에서 "재판이 열리고 변호인 반대신문이 진행되자, 선생(변호인인 필자)의 그 간결하고 세련된 유명한 꼭지따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김지하는 일종의 즉문즉설 형식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변호인이 "피고인은 공산주의자입니까? 라고 묻자 "아닙니다" 라고 답한다. 이어 변호인이 "그럼, 왜 이런 재판을 받게 됐습니까?라고 재차 묻자 그는 "나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를 두고 한 변호사는 "강타였다. 사건의 실체를 한두 마디 물음으로 요약해 간단히 드러내버리는 거였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혹했던 시절은 결국 시 '오적'을 실었던 월간 '사상계'를 뒤흔들었다. 사상계는 1970년 9월29일자로 등록을 취소당했으며, 취소 이유는 자체 인쇄소를 지니지 못한 출판사의 경우 인쇄 계약을 체결한 인쇄소 책임자를 잡지의 인쇄인으로 등록하라는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상계는 정부를 등록취소처분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1971년 10월26일 서울고법 특별부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김지하의 주장이다. 그의 생각과 철학이다. 김 시인은 자신의 시를 어떤 사회적 혁명을 선동하는 거대 담론으로 말하지 않고, 일종의 해학과 풍자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 철학은 훗날 40여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이어진다. 일각에서 변절이라 손가락질을 했지만, 애초에 자신의 철학은 그대로 흔들리지 않고 이어진 셈이다.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 시인이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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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야. 그걸 떼먹어?"


십수년이 흘러 민주화 정부가 들어서고 김지하의 오적도 잊혀갈 즈음 과거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민청학련)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수감돼 사형선고까지 받은 김지하는 2013년 1월4일 무죄를 선고 받으면서 또 한번 오적을 꺼내들었다.


김지하는 당시 열린 공판 진술에서 자신의 시는 오로지 풍자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부패된 자들을 고발했던 것"이라며 "우리나라 시의 가장 큰 영역은 '풍자'"라고 말했다. 또한 시를 통해 사회를 고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시인이므로 시를 통해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라며 "싸이의 '젠틀맨'이나 '강남스타일'도 모두 풍자인데 법으로 제한하면 르네상스를 어떻게 구현하고 창조경제를 일으키겠느냐"고 역설했다.


김씨의 변호인도 "오적 시는 국가의 부정부패를 풍자한 시"라며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한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또 김씨는 "체포돼서 고문이 있었냐'는 변호인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면서 재심 개시 사유도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수 개의 범죄사실을 유죄로 인정해 하나의 형을 선고한 판결에서, 그 중 일부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재심청구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인정된 경우에는 판결 전부에 관해 재심개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재심사유가 없는 범죄사실을 재심사유가 있는 범죄사실과 함께 하나의 형을 선고했다는 우연한 사정으로 오적필화사건을 다시 심리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김지하의 '오적'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하고 말았다.


재판 직후 그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오적에 대해 "내가 오적을 쓸 때도 사업가들이 뇌물 주는 건 욕하지 않았어. 하지만 국고금 빼먹은 놈은 찢어 죽여야 한다고 했어. 내 신념이야, 아니 민중의 신념이야. 장사꾼이 뇌물 주는 것은 상관없다 이거야. 그런데 국고금이라는 건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야.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거기에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집권한 자들이) 돈을 쳐먹어?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부하는 목포 광주 한(恨)의 천재들이? 망월동 피값 받은 외에 또 받아?"라고 다시 한번 정부를 비판했다.


그의 비판 대상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오로지, 정치권과 고위 관료 비리에 대한 비판적 견해만 있을 뿐이었다. 독재 정권 시절에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짖으며 비판한 오적이 민주화 정부에도 그대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그의 불호령에 당시 많은 시민들이 공감했다.


1988년 9월1일 서울 여의도 백인회관에서 열린 88서울민족문학 페스티발에서 김지하 시인이 세계문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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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 노선 지향한 김지하…朴 지지 선언 사과도, 이후 촛불집회 긍정적 평가


그런 김지하는 정치적으로는 중도 노선을 걸으며 화해, 통일, 환경, 교육 등 사회 현안에 집중했다. 지난 2006년 11월9일 그는 '화해상생마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90년대 '저주의 굿판' 칼럼을 끝으로 사실상 시국발언을 자제하던 김지하가 이제는 환경과 생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다만 정치권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중도라는 관점에서 볼 수는 있겠지요. 박정희시대는 경제개발을 했지만 독재정치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고, 민주화세력은 자기희생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때로는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사쿠라, 변절자, 배신자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2008년 5월 촛불집회 당시 시집 <못난 시들>(이룸)을 들고 나와 "조직도 지도자도 없이 질서를 유지하며 집단 이성 합의에 의해 비폭력으로 유지된 촛불은 우주적 사건" 이라고 평가했다. '못난 시들'은 촛불집회에 관한 시들로, 허례허식을 벗어던진 진솔한 형식으로 구성, 어렵지 않고 좀 쉽게 시를 쓰라는 아들의 충고을 받아들인 시집의 형태였다.


훗날 그는 2012년 대선에선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해 또 다시 '변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을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2016년에 쓴 '바보1'에선 '박근혜를 지지하면서/ 최순실이를 몰랐고/ 그 애비/ 최태민이를 몰랐다./ 그렇다./ 바보만이 그럴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 촛불집회 ·미투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전해 주목받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에는 비판적인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이후 2018년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김지하는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던 시인 김지하씨가 재심을 통해 39년 만에 누명을 벗은 후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공판을 마치고 나오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3년 1월 4일.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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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생활을 해오다 8일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씨와 결혼한 고인은 유족으로는 아들 김원보(작가)·김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화관 관장)씨 등이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시집으로는 '남(南)'(1984), '살림'(1987) , '애린 1'(1987), '검은 산 하얀 방'(1987),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나의 어머니'(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화개'(2002), '유목과 은둔'(2004), '비단길'(2006),'새벽강'(2006), '못난 시들'(2009), '시김새' (2012), '흰 그늘'(2018)등이 있다.


1975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2002년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제10회 대산문학상, 제17회 만해문학상, 2003년 제11회 공초문학상, 2005년 제10회 시와 시학상 작품상, 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2011년 제2회 민세상 등을 수상했다.


1993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2006년 제주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명지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국대학교, 원광대학교에서 석좌교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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