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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굿바이' 브루스 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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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증으로 배우 은퇴선언…'한물간 배우' 조롱에도 끝까지 최선 다해
1980년대 미국이 필요했던 영웅 그려…인간미 넘치는 시대의 아이콘
'다이하드' 시작으로 대박 행진…집념으로 사건 해결하는 반영웅
'아마겟돈' 통해 눈 뜬 새로운 표현, '식스 센스'서 무르익어

[라임라이트]'굿바이' 브루스 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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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으로 은퇴했다. 연기할 수 없을 만큼 인지력이 떨어졌다는 이유다. 근래 대폭 줄인 대사량을 이어폰으로 전달받고, 액션 장면 대부분도 배역 배우에게 기댔다고. 자기가 무슨 영화를 촬영하는지 모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 3년간 3류 주문형 비디오(VOD) 영화만 열네 편 출연한 이유인 듯하다. 그는 한물간 배우라는 조롱거리가 되고도 개의치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윌리스의 연기 인생은 강한 집념으로 요약된다.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한 영화 제목부터 ‘다이하드(죽도록 고생하는·1988)’다. 그가 그린 존 매클레인은 새로운 리더십과 영웅이 요구된 1980년대에 ‘람보(1982)’의 존 J. 람보(실베스터 스탤론)에 이어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강한 남성의 복귀를 알리며 관료주의와 현대사회를 향한 반감을 가감 없이 나타내서다. 람보처럼 반사회적 배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머러스하고 인간미가 넘쳤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하는 도입부만 봐도 알 수 있다. 매클레인은 착륙으로 기내가 심하게 요동치자 팔걸이 모서리를 손으로 꼭 쥔다. 이를 훔쳐본 옆자리 승객은 비행기 공포를 이겨낼 해결책을 알려준다. "항공 사고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 싶소? 목적지에 도착해서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발가락으로 주먹을 만들어봐요." 매클레인은 흘려듣지 않는다. 러닝셔츠 차림으로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발가락을 연거푸 움츠린다. 별다른 느낌이 없자 실소하며 혼잣말한다. "웃기는 놈. 발가락으로 주먹을 만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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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웃음은 지갑에서 가족사진을 꺼내어 보며 따뜻한 미소로 바뀐다. 윌리스가 이후 스크린에서 자주 보인 미국 노동자의 얼굴이다. 미국은 1980년대 들어 중산층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힘들어졌다. 나라 간 시장 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유롭게 무역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경제 이데올로기가 뿌리내리면서 제조업 강국의 신화가 무너졌다. 여성의 사회 진출로 아버지의 역할마저 축소돼 남성 위기론이 대두됐다. 사회운동가 로버트 블라이 등은 아버지들이 아들을 남자답게 훈육하는 역할 모델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며 남성성 회복이 미국 사회의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뜨거운 요구에 할리우드는 백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액션 영화로 부응했다. ‘터미네이터(1984)’, ‘인디아나 존스(1984)’, ‘탑건(1986)’, ‘리썰 웨폰(1987)’, ‘로보캅(1987)’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다이하드’는 연장선에서 이상적 모델보다 공감으로 방향을 틀었다. 매클레인은 반영웅에 가깝다. 가정에서 나약하고 소외돼 있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도 거칠고 투박하다. 연신 담배를 물고 욕설을 하며 테러리스트들을 잔인하게 해치운다. 별다른 기술은 없다. 상대 등 뒤에 매미처럼 매달려 목을 조를 뿐이다. 다만 벽이 부서지고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져도 붙잡고 늘어질 만큼 집념이 상당하다. 힘겹게 함정과 보복 사이를 빠져나가는 그에게 뒤늦게 출동한 경찰과 연방 수사관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매클레인은 원통한 얼굴로 한탄한다. "다신 이런 고층 빌딩에 오나 봐라. 하느님, 살려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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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한 편(블루문 특급)에서만 두각을 보였던 윌리스는 단번에 할리우드 최고 스타로 부상했다. 속편 네 편은 물론 출연하는 영화마다 대박을 쳤다. 절정은 영화관 수입만 5억5370만 달러(약 6719억 원)를 기록한 ‘아마겟돈(1998)’이다. 윌리스는 지구로 날아오는 텍사스주 크기의 소행성 지층에 핵탄두를 설치하는 해리 스탬퍼를 연기했다. 매클레인처럼 가족애가 넘치는 집념의 사나이지만 표현한 방식은 판이했다. 이전 연기 패턴과 요령을 과감히 버리고 말하는 리듬부터 신체 표현까지 달리했다. 감정적 격양과 불퇴의 각오를 절묘하게 엮어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감동을 자아냈다.


소행성 지면의 구멍을 뚫지도 않았는데 국방부에서 원격 조정으로 핵폭탄을 터뜨리려는 일촉즉발 상황이 대표적인 예다. 스탬퍼는 폭탄을 두고 떠나자는 윌리엄 샤프 대령(윌리암 피츠너)을 렌치로 제압하고는 눈물을 머금으며 설득한다. "난 지구의 땅을 30년이나 뚫어왔소. 단 한 번도 목표한 깊이를 뚫지 못한 적이 없지. 이번에도 반드시 800피트를 뚫고야 말 것이오! 나 혼자서는 해낼 수 없소. 도와주시오, 대령. 반드시 파낼 것이오. 하늘에 맹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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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스는 감정적 호소에 기대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말투로 윽박이나 협박으로 오해될 여지를 최소화했다. 선한 눈빛으로 피츠너를 내내 응시하며 극 전체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연기 교육가 해럴드 거스킨를 만나 자유롭고 창의적인 표현법에 눈뜰 수 있었다. 내면의 본능과 감정, 실제 삶의 투박함을 온전히 나타내 스탬퍼와 하나가 됐다.


새롭게 발견한 가능성은 이후 액션 영화의 틀을 벗어나는 동력으로 발전했다. 백미는 멜로와 공포를 정서적으로 전달한 ‘식스 센스(1999)’의 말콤 크로우 박사다. 차분한 표정과 말투로 애절함과 오싹한 긴장을 고루 전달한다. 윌리스는 감정적 초석에 상당한 공을 기울였다. 자신의 업적이 새겨진 표창장 액자에 반사돼 나타나는 아내 안나 크로우(올리비아 윌리암스)를 향한 사랑과 미안함의 표현이다. 완숙한 연기로 아동심리학에서 성과를 내느라 뒷전으로 밀린 아내에게 진심을 드러내 극 후반 후회와 번민의 기운을 배가한다. 여전히 틀에 갇혀 주변을 보지 못한다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암시와 어우러져 순환과 재생의 가치까지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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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우 박사는 삶과 죽음을 단절화해 자아와 타자를 만들어낸 그림자 인간이다. 무한한 틀에서 벗어나 진실을 마주하고는 자신이 정신상담을 맡은 콜 세어(할리 조엘 오스먼트)에게 치유를 받았음을 깨닫는다. 이 같은 삶의 맹점은 우리가 자신을 특정 프레임에 가둘 때 비극의 시발점이 되고 만다. 무르익은 연기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해온 윌리스가 다시 진실을 마주하고 일어서기를 기원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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