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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커밍아웃 이후, 나도 성장한다 '너에게 가는 길' [강주희의 영상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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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부모 다룬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니…" 투사된 엄마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사진=엣나인필름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사진=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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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당신은 그 장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지 않으신지요. 이는 영화가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는 현실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영상 속 한 장면을 꺼내 현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전해드립니다.

[아시아경제 강주희 기자] "제 아들은 동성애자입니다" "제 아이는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 입니다."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는 두 엄마 나비·비비안(활동명)은 자신의 자녀를 이렇게 소개한다. 지금은 익숙한 멘트지만, 이 소개를 웃으며 당연하게 말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모든 걸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내 아이. 그런 아이가 세상이 멸시하고 혐오하는 바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아이는 지금껏 그런 세상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왔다는 사실을 두 엄마가 깨닫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나비와 비비안은 이제 무지개 팔찌를 손목에 차고 차별과 혐오가 빗발치는 세상과 맞서는 '투사'가 됐다. 변규리 감독이 연출한 '너에게 가는 길'은 두 엄마가 당당히 '성소수자의 부모'라고 외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커밍아웃 편지 받은 그날

28년차 승무원인 비비안은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을 만난다. 일을 하면서 간혹 동성애자로 보이는 커플을 마주친 적도 있다. 그렇게나마 막연하게 성소수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가족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 아들 예준이 어느 날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털어놓기 전까지는 그랬다.


비비안은 예준의 커밍아웃 편지를 봤을 당시를 잊을 수 없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마음속에선 혼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며칠 동안은 밥도 못 먹고 울기만 했다. "불행하게 낳아준 엄마가 미안하다"며 자책하는 말을 예준에게 하기도 했다. 그때는 이 말이 얼마나 예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인지 알지 못했다.


34년차 소방관인 나비 역시 평생 딸인 줄로만 알았던 한결로부터 '자신은 트랜스젠더 남성'이라는 커밍아웃을 듣고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남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한결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차별받고 여자로 사는 게 힘든 세상이라서 남자가 되고 싶은 건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성별정정수술을 받고 싶다는 한결의 말을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트랜스젠더에 대해 흔히 갖는 편견적인 생각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실은 내가 내 자식을 잘 몰랐던 거지." 나비는 그때의 자신을 이렇게 돌아본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사진=엣나인필름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사진=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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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

자녀의 커밍아웃 후, 성소수자부모모임에 나가게 된 나비와 비비안은 자신들과 같은 혼란을 겪고 있는 수많은 부모가 있음을 본다. 세상에는 단순히 '남성' 혹은 '여성'으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성정체성이 있고, 남성이면 여성을, 또는 여성이면 남성을 사랑하는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살면서 옳다고 믿었던 수많은 규범과 스스로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버려야 하는 과정이었다.


일례로 나비는 한결이 트랜스젠더가 아닌 레즈비언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처음 나가던 날, "레즈비언 한결의 엄마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결은 이 말을 곧바로 정정했다. "우리 엄마는 제가 레즈비언인 줄 알지만, 저는 트랜스젠더 남성입니다." 성별정정수술을 했든 안 했든,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비는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영화는 나비와 비비안이 성소수자에 대해 알아가는 이 과정을 주요하게 다룬다. 성소수자 당사자도 커밍아웃을 위해 결단이 필요하지만, 부모 역시 '성소수자 부모'라는 사실을 정체화하기 위해 또 다른 결심을 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고도 힘든 일이지만 두 엄마는 그 일을 멈추지 않는다.


처음엔 내 자식을 조금 더 잘 알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이것이 옳다는 확신이 생겼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차별받는 대상이 되어선 안 되며,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온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상황을 겪고 있지만, 이 사실 만큼은 모두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사진=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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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나선 부모들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가 열리던 날, 두 엄마는 축제를 반대하는 집회 참가자들과 마주한다. 성소수자에게 가장 냉담하고 가혹한 혐오의 말들이 대포처럼 쏟아졌다.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동성애유전자 없음', '사랑하니깐 반대합니다' 피켓을 들고 "집에 가!", "뭐하러 왔어", "동성애는 불법행위다" 등을 격렬하게 외쳤고, 일부는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함께 고민을 이야기하고 위로와 조언을 나누던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나비는 이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대명천지(大明天地)에 경찰들이 그렇게 많이 서 있는데,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마음 놓고 때릴 수 있는 세상. 부모들이 이런 데 나오면 무서워서 다시는 애들에게 그런데 나가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 사람은 그게 아니더라. '이런 세상에서 애들이 살고 있단 말이야? 부모라도 싸워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비와 비비안은 이날 축제에 참가한 많은 성소수자들을 꼭 안아줬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사진=엣나인필름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사진=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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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엄마는 세상과 싸우는 이 일이 꼭 자녀를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잘 몰랐던 성소수자에 관해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 그리고 가족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는 과정에서 자신도 달라졌음을 매번 느낀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성장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너에게 가는 길'의 엔딩 크레딧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들이 한 명씩 나와 "내 아이는 성소수자입니다"라고 자신과 자녀를 소개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닌,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메시지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것처럼, 성소수자 역시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외침이다. 부모들은 지금도 세상을 향해 커밍아웃한다. 내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더 나은 세상과 당연한 권리를 위해서.




강주희 기자 kjh81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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