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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산책] 대표작서 청혼편지까지…인간 박수근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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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서 역대 최대 전시
유화·수채화·드로잉 작품 174점 포함
스크랩북·스케치·엽서 등 자료 100점
故 이건희 회장 기증품도 대중에 첫선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1962, 캔버스에 유채,  130x89cm, 리움미술관.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1962, 캔버스에 유채, 130x89cm, 리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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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육신적(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될 겁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이 아내 김복순에게 보낸 청혼편지다. 박수근은 1936년 강원 금성(현재 북한지역)에서 윗집 처자였던 김복순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당시 김복순은 부모의 뜻에 따라 춘천의 의사 집안과 약혼이 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박수근은 포기하지 않고 연애편지를 보내며 열정적으로 구애했다. 박수근이 상사병으로 앓아누웠을 땐 그의 아버지까지 나서서 김복순 집안과 담판을 벌였다. 마침내 박수근은 1940년 스물 일곱의 나이로 결혼에 성공한다.

결혼 후 박수근은 평양과 금성을 오가며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수근은 아내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국군을 도와 그림을 그렸던 박수근이 인민군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먼저 피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아내도 두 아이를 데리고 사선을 넘어 월남에 성공했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1952년 서울 창신동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


박수근의 '판잣집', 1950년대 후반, 종이에 유채, 20.4x26.6cm,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박수근의 '판잣집', 1950년대 후반, 종이에 유채, 20.4x26.6cm,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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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박수근은 처자식과 상봉하고 창신동 판자촌에 터를 잡아 본격적인 전업작가로 활동했다. 그가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창신동에서 그림으로 생업을 꾸려가던 시기가 화가로서의 최대 전성기였다. 기구한 삶이 예술혼을 깨워서일까 아니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난한 화가의 필사적인 몸부림 때문이었을까. ‘절구질하는 여인(1954)’ ‘나무와 두 여인(1962)’ ‘아기 업은 소녀(1962)’ 등 박수근의 대표작은 대부분 이 시기에 탄생했다.


박수근의 일생을 한눈에 들여다보는 전시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이래 첫 박수근 개인전이자 역대 개최된 박수근 전시회 중 최대 규모다. 박수근의 유화·수채화·드로잉 등 작품 174점을 비롯해 박수근이 직접 잡지나 그림을 모은 스크랩북·스케치·엽서 등 자료 100점이 출품됐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이번 박수근 회고전은 아마 일생에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전시라 자부한다"면서 "작가 초기부터 만년까지 시대·소재·기법별 다양한 작품을 총망라했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마련된 박수근 회고전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실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마련된 박수근 회고전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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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은 한국적이고 서민적인 화풍으로 사랑받는 작가다. 그의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초가집 흙벽이나 불상의 돌조각을 연상케하는 거친 마티에르(질감)가 돋보인다. 박수근은 물감을 가로로 쌓은 뒤 어느 정도 마르면 다시 세로로 쌓는 것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색층을 만들었다. 물감이 덩어리지면 도상의 틀을 만들고 나중에 선을 입히는 형태로 작업했다. 그는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박수근이 활동하던 1960년대 전후로 한국엔 서구 추상미술이 급격히 유입됐다. 전시장에는 박수근이 명동을 드나들며 ‘미즈에’와 ‘미술수첩’과 같은 일본 잡지를 꾸준히 구입하고 ‘양화집’을 스크랩한 기록들도 볼 수 있다. 피카소와 페르낭 레제 같은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한 흔적도 있다. 미술용어를 학습거나 조르주 루오, 앙리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의 그림을 별도로 모아두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박수근은 서구 모더니즘과 추상표현주의를 자기 작품에 녹아내려고 시도했다"면서 "자신이 하고자 했던 회화 방향과 당시 주류와의 접점을 어떻게 찾았는지 화가의 전략에 집중해봤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박수근의 '도마 위의 조기', 1952, 18x24.2cm, 하드보드에 유채, 개인소장.

박수근의 '도마 위의 조기', 1952, 18x24.2cm, 하드보드에 유채,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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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오른쪽)과 가족들.

박수근(오른쪽)과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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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그림엔 유독 여성과 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그의 그림에서 고단한 노동을 하는 여성과 잎사귀를 다 떨군 나목은 춥고 배고팠던 전쟁 이후 시대를 맨몸으로 견뎌낸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박수근은 창신동 집에서 명동 미8군 PX, 을지로 반도화랑을 오가며 마주한 거리 풍경과 이웃의 모습을 주로 화폭에 담았다. 자신의 아내와 딸을 모델로 한 작품도 여럿 그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대중에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도 있다. 유화 7점과 삽화 원화 12점 등 19점이다. 이 중 ‘마을풍경’ ‘산’ ‘세 여인’ 등 3점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기증품이다. 1962년 작품 ‘노인들의 대화’는 조지프 리(1918~2009) 미국 미시간대 교수가 1962년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구입했던 작품이다. 그동안 이 작품의 존재는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조지프 리가 타계한 후 미시간대 미술관에 기증되면서 공개됐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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