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마음에 가 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잘나가는 문학평론가이자 정치평론가인 지성은 오랜 동료이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시인 민주와 하룻밤을 보낸 후 민주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다. 하지만 지성은 그런 마음을 거절하는데, 이후 민주는 지성을 미투 가해자로 지목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지성. 비평이 업이었으나 이제는 품평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성은 일순간 몰락을 경험한다. 저자는 그런 현실의 이면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다층적인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를 통해 저자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유무죄 여부를 독자들에게 반문한다.
"민주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는 창에 한쪽 팔을 기대고 목을 양옆으로 움직였다. 민주의 사랑. 그것을 누가 믿는단 말인가. 민주는 보이는 모든 걸 사랑하는 종족이다. 우울증과 경계선 인격장애, 공황장애. 수많은 질병을 짊어진 채 만나는 생물들에게 잡아먹을 듯 덤벼든다. 지성은 상대에게 제 인생을 확 끼얹어버리는 듯한 민주가 부담스럽고 불길했다. 사랑한다니. 그런 얼굴로, 귀족처럼 꼿꼿이 앉아 만인 앞에서 명령하듯 제 감정을 공표하다니. 대체 어쩌란 말인가. 손을 내밀면 확 끌어당겨 순간을 만끽한 뒤 곧바로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것을 아는데 어찌 그 손을 잡는단 말인가." <78쪽>
“잘 봐. 한계에 갇혀 있는 건 형이야. 형이 학문에 갇혀 있는 거지. 내가 진짜로 살고 있는 거고. 형이야말로 그 함정에서 빠져나와. 말, 글,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지금 숨 쉬고, 말하고, 움직이는 몸, 그게 형이잖아? 그게 형이 그토록 좋아하는 실존이라고. 형한테 시뻘겋게 마음을 드러내는 이 여자!”
민주가 한 손으로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리를 높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진심을 토해내는 이 여자가 더 살아 있는 거라고!” <137쪽>
"여성의 육체에 멋대로 손대고 제 것처럼 구는 것은 분명 범죄고 폭력이다. 폭력으로 분류돼 처벌받아야 한다. 지성은 그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가 없다. 남성들은 그 악습을 수십 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살아왔다. 사회의 상식이 급변했다면 그 변화 속도를 따라갈 기회를 조금이라도 마련해주어야 하지 않은가? 범죄가 아니라 여겨졌던 것을 범죄로 인식하고 갱생할 기간을 주어야 하지 않은가? 예전에는 터프함 또는 과격함으로 축소되고 용납되었던 크고 작은 범죄행위들을 속죄할 방법이 죽음 또는 사회적 매장밖에 없다면, 사회적 지위를 모두 잃고 낙인찍혀 남은 평생을 쓰레기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면, 어느 누가 성범죄자임을 인정하고 속죄하려 들겠는가." <377쪽>
(정아은 지음/문예출판사)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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