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5년 영국 게임 매니아들이 창업한 '게임즈 워크샵'
美서 건너온 '던전 앤 드래곤' 접하고 자극 받아
전략 테이블탑 게임 '워해머 시리즈'로 업계 정점 올라
화려한 그래픽 없이도 '세계관'에 충성하는 팬층 두터워
창업자 "단순한 장난감 병정 아냐…번듯한 취미생활"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구글보다 더 수익성 높은 회사."
영국 일간 '가디언'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보드게임 제작업체 '게임즈 워크샵'을 집중 조명하며 쓴 문구다. 최근 연간 실적을 발표한 게임즈 워크샵은 영업이익률이 무려 43%를 기록, 세계 최대의 IT 기업 중 하나인 구글(25%)보다 높은 수익성을 보였다. 게임즈 워크샵은 모형 말과 주사위를 이용해 즐기는 이른바 '테이블탑 게임' 전문 제작사. 보드게임과 모형 말을 판매하는 회사는 어떻게 내노라 하는 혁신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코로나 수혜'로 역대 최대 실적 달성한 게임즈 워크샵
게임즈 워크샵은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1년간 3억6100만파운드(약 577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1억5500만파운드(약 2480억원)의 마진을 남겼다. 창사 이래 최고 실적으로, 주가 또한 크게 치솟으면서 전 직원에게 5000파운드(800만원)에 달하는 보너스가 지급될 정도였다.
영국의 비즈니스 전문 매체 '디스 이즈 머니'에 따르면, 게임즈 워크샵은 2년째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에 간접적인 수혜를 입었다. 전세계적인 봉쇄 조치로 사람들이 바깥에서 즐길 게 없어지자, 모형 말 수집이나 보드게임 등 '탁자 위에서 할 수 있는' 취미 생활로 관심을 돌렸다는 분석이다.
온라인 주문은 지난 1년 동안 무려 70% 이상 상승했으며, 전세계 약 500개 이상의 독립 소매점이 게임즈 워크샵의 새 파트너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테이블탑 게임에 다소 생소한 편인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에도 게임즈 워크샵의 제품을 취급하는 테마 카페가 열릴 예정이다.
◆미국산 '테이블탑 게임' 접한 뒤 워해머 시리즈 고안
올해 46번째 생일을 맞는 게임즈 워크샵은 지난 1975년, 영국 런던에서 탄생했다. 자타공인 '보드게임 매니아'였던 존 피크, 이안 리빙스톤, 스티브 잭슨 세 사람이 설립한 이 기업은 미국의 유명 게임인 '던전 앤 드래곤'을 수입 판매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PC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전인 1970년대, 청년층은 보드게임을 주로 즐겼다. 이 가운데 게임즈 워크샵이 수입한 던전 앤 드래곤은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이른바 'RPG(롤플레잉 게임)'다. 탁자 위에 두꺼운 룰북을 펼쳐놓고, 주사위를 이용해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조작해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는 방식의 게임이다. 오늘날 컴퓨터 게임 장르로 유명한 RPG의 초창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던전 앤 드래곤을 처음 접한 창업자들은 기존의 보드게임과는 전혀 다른 게임 진행 방식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당시 보드게임은 카드나 주사위를 이용해 점수를 올리는 간단한 게임에 불과했지만, 던전 앤 드래곤은 지하동굴을 탐험하거나 용과 싸우는 등 본격적인 '체험'에 목적을 뒀기 때문이다.
창업자들은 이를 '게임의 미래'로 여기게 됐으며, 자신들이 직접 테이블탑 게임을 설계하기로 마음 먹게 된다. 이들의 갖은 노력 끝에 탄생한 게임이 바로 오늘날까지 게임즈 워크샵의 '간판' 역할을 맡고 있는 '워해머 시리즈'다.
창업자들이 '던전 앤 드래곤'을 접한 뒤 자극 받아 제작한 '워해머 시리즈'는 플라스틱이나 나무를 깎아 만든 병정 모형들로 상대 진영을 제압하는 전략 테이블탑 게임이다. / 사진=게임즈 워크샵 홈페이지
원본보기 아이콘워해머는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병정 말들을 움직여 상대와 겨루는 전략 테이블탑 게임이다. 다만 장기, 바둑, 체스 등 기존 전략 게임과는 달리 각 병정마다 복잡한 룰이 존재한다. PC가 등장한 이래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손과 주사위로 구현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워해머 시리즈가 탄생한 뒤, 게임즈 워크샵은 현재까지 테이블탑 게임 업계에서 '정점'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게임즈 워크샵 공식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게임즈 워크샵이 제작한 플라스틱 모형은 매년 수천만개 이상 팔려 나가고 있으며, 전세계 100개 이상 나라에 워해머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소매점만 516개에 달한다.
◆최신 비디오 게임 못지 않은 장난감 병정들…비결은 '메타버스'
워해머는 수십년째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최신 3D 그래픽을 갖춘 비디오 게임과 달리 직접 말을 움직이고 룰을 기억해야 한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즉 수십년 전 만들어진 테이블탑 게임에 불과하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게임즈 워크샵이 계속해서 역대 최대 실적을 갱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즈 워크샵 창업자 중 한 명인 이안 리빙스톤은 그 비결을 '메타버스'에서 찾는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뜻하는 메타(meta)와 현실을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친 신조어로, 주로 디지털 기술을 통해 정교하게 모사한 가상현실을 의미한다.
리빙스톤이 최근 펴낸 저서에 따르면, 워해머 시리즈의 팬들은 단순히 게임만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워해머가 제공하는 세계관에 '완전히 빠져든다'는 설명이다.
워해머 시리즈는 지금으로부터 약 수만년 후 미래의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게임즈 워크샵은 이런 배경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수십명의 전문 작가들을 고용, 워해머 세계관의 역사를 세세하게 설정하고 이를 소설, 만화책 등으로 풀어 쓰기도 한다. 새로운 게임을 소개할 때에도 마치 실제 벌어진 일을 설명하듯 전문 성우가 내레이션을 한다.
이렇다 보니 워해머 팬들이 게임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자못 진지하다. 게임 플레이에 필요한 규칙들이 적힌 룰북은 '로어(Lore·구전 전설이나 신화를 이르는 말)'라고 불리며, 모형 말에 페인트 칠을 할 때도 나름의 법칙과 전통을 세세하게 따진다.
이에 대해 리빙스톤은 "사람들은 모형 말을 사고, 말에 색칠할 페인트나 룰북을 구매한다"라며 "과거 단순한 장난감 병정들은 이제 번듯한 취미생활이 됐다"라고 강조했다. 비록 워해머가 최신 전자기기로 구동되는 게임들처럼 3D 그래픽이나 AR·VR 기술로 무장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이에 호응하는 '팬심'을 바탕으로 메타버스를 이뤄냈다는 설명이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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