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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 '스마트그리드'가 떠안은 대한민국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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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탄소제로 정책 속
재생에너지로 전력 충당 불가
단전 없이 안정적으로 쓰려면 생산-소비 매순간 일치해야

김병민 과학저술가

김병민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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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를 먹으면서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누구나 저마다 맛집이 있듯이 저도 강릉 안인항 근처에 있는 식당이 떠올랐습니다. 십여년 만에 찾아간 강릉의 모습은 강산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하더군요. 무작정 지리적 기억을 방편 삼아 항구에 도착하니 강산의 변화를 넘어 거대한 검은 물체가 추억을 모두 삼켜 버렸습니다. 가까이 보니 검은 물체의 정체는 거대한 안인화력발전소 공장이었고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주변에는 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먼지를 뒤집어 쓴 붉은 천에 새겨져 마냥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정부는 온실가스 배출을 제로로 한다는 CF100, 그러니까 무탄소(Carbon Free) 100%라는 카드를 꺼냈는데 화력발전소 건설은 어떤 연유일까요. 이보다 앞서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로 산업용 전력을 온전히 충당하겠다는 RE100정책이 있었죠. 이 정책은 다양한 수준의 많은 환경 문제를 안고 있는 원전을 탈출하는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얼핏 보면 두 정책 모두 괜찮은 선언처럼 보입니다. 현재를 위해서 미래의 기회를 끌어다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두 정책이 서로 미묘한 배반을 품고 있습니다. 탈원전으로 모자라는 전력 수급을 당분간 석탄이 맡아야 하니까요. 이유는 태양과 바람 그리고 물에 의지한 에너지만으로 도저히 수요 전력을 충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탄소 정책으로 원자력 발전이 다시 추동력을 얻고 있습니다. CF100과 RE100은 상호보완적 구조가 아니라 선택적 문제가 됐습니다. 그래서 최근 지구와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스마트그리드(Smart Grid)가 등장했죠. 투자에 눈 밝은 사람들은 벌써 뭔가 똑똑해 보이는 전력망과 관련한 주식을 사들입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선언된 모든 말들을 하나하나 보면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묘한 얽힘과 공허한 선언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하나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명은 전기로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전기 문명이 없다면 상상할 수 없는 시대인 거죠. 만약 단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통보가 날아온다면 사람들은 지옥 같은 일상을 상상하며 머리가 복잡해질 겁니다. 그러면 전기를 만들고 남는 전기를 저장해 필요할 때 사용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별다른 고민 없이 ‘스마트그리드’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전기의 고유한 특성이 우리 고민거리 중심에 있다는 겁니다. 결국 이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재의 에너지 정책을 정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그 특성은 전기는 전기를 만드는 발전과 전기를 사용하는 소비가 매 순간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심 인근에 자리잡은 발전소 전경.(사진출처=픽사베이)

도심 인근에 자리잡은 발전소 전경.(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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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기반 '스마트 그리드'
전자 군단 가뒀다 필요시 사용
그리드 전체가 하나의 생태계
기술뿐 아니라 체질변화 필요

전기의 정체는 전자의 군단입니다. 가령 휴대폰은 약 5암페어(A)의 전류를 사용하는데, 1초 동안 회로를 흐르는 전기의 양을 만드는 전자의 수는 약 3.125×10의 19제곱, 지구에 사는 인구를 70억명으로만 잡아도 인구수의 44억배보다 많은 전자가 순간적으로 필요한 거죠. 이 전기는 무조건 도체를 타고 흘러야 합니다. 전기가 흐른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빛처럼 빠르게 흐르는 걸까요? 전력망인 그리드를 구성하는 구리나 알루미늄 같은 금속에는 이미 자유전자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가득 찬 호스와 같은 겁니다. 전류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틀면 압력에 의해 아무리 멀리 있는 호스 반대편에서도 바로 물이 밀려 나오는 원리인 셈이죠. 발전소에서 만든 전자 군단을 전압으로 그리드에 밀어 넣으면 전력망에 연결된 모든 기계가 생성한 만큼의 전자 군단을 어디서든 이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기를 만들면 어떤 수요자든 그리드에 연결해 전기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전기는 공장에서 만들지만 일반 상품처럼 실체가 있는 물건도 아니고 택배처럼 배송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공급자는 소비 전력을 예측해 전기를 만들고 그리드에 공급하는 겁니다. 이런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지 않으면, 특히 공급 전력이 넘쳐도 문제지만 모자라면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불균형으로 벌어지는 일이 단전입니다. 부분적으로 단전하지 않으면 전력망인 그리드 전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오르막을 만납니다. 이 경사를 넘기 위해 가속페달을 밟아 엔진 회전수를 늘리죠. 그런데 가파른 경사가 계속되면 엔진이 견디지 못해 결국 차가 고장 납니다. 단전은 전기 생산의 총량보다 수요가 많을 때 전력망 자체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 지역의 수요를 강제로 끊는 것이고 수요로 비유되는 도로의 언덕을 낮춰 엔진 회전수인 전력 주파수를 유지하는 작업인 셈입니다.


지금 회자하는 스마트그리드는 이 전자 군단을 화학적 방법으로 잠시 특정 원자에 가뒀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배터리와 정보통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력망 소비자가 생산자도 될 수 있다는 거죠. 지금까지의 중앙집중 방식에 더해 가정과 기업에서 재생에너지로 발전설비를 갖춰 자체 충당하고, 남는 것은 저장하거나 그리드로 보내겠다는 겁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렇게 지속 가능한 에너지 체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불가능한 게 아니라 에너지 시스템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거대한 일이고 오랜 시간과 자원이 필요합니다.


전력망인 그리드는 전체가 하나의 기계이자 생태계입니다. 그러니까 발전소에서 송전탑을 거치고 전봇대에 달린 변압기를 통해 각 가정의 콘센트까지 연결된 하나의 몸체인 셈이죠. 이 전력망이 스마트하게 바뀌려면 IT 기술도 필요하지만 체질 자체도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2G폰으로 5G망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죠.


더 중요한 것은 전력 공급이 재생에너지만으로 가능하냐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전기 문명이 원활하게 움직이는 데는 최소한의 공급 전력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원전과 석탄이 이를 충당하고 있는데, 이 원천이 사라진 빈자리를 재생에너지만으로 메울 수 있을까요? 변덕스러운 자연은 예측할 수 없어 안정적 전력 공급이 어렵습니다. 태양광 패널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없애고 멈춘 바람을 불기 위해 날씨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전국의 산을 밀어 태양전지 패널로 덮을 수도 없죠. 스마트그리드가 요동치는 주파수를 보완한다고 하지만 석탄과 원자력만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측하지 못하는 전류 변화가 그리드에 진입할수록 전력망에 복잡성을 만들고 여기에서 예측불허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유럽의 사례를 들지만, 미국은 그리드가 분할돼 있고 유럽은 지형적으로 각국의 그리드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전력이 모자라면 빌려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가까운 이웃이라야 중국과 일본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리드를 한 국가 안에서 구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드 문제는 국가 경계가 사라지는 세계사적 유례없는 자원의 합의에서만 유효합니다. 그리고 스마트그리드의 핵심 부품인 에너지 저장장치도 넘어야 할 기술적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CF100과 RE100 문구 아래에서도 당분간 석탄과 원자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력망으로 연결된 가상 도심.(사진출처=픽사베이)

전력망으로 연결된 가상 도심.(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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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개인도 기업도
"지속 가능한 미래" 외치지만
인프라 위한 노력은 없어

도심에서는 변압기가 달린 전봇대를 볼 수 없습니다. 그리드의 일부를 흉물인양 눈앞에서 치워 버렸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지나 봅니다. 지구와 인류의 운명과 얽혀 있는 실체를 인식조차 하려 들지 않습니다. 전기는 여태까지 생산 비용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기료를 지불하고 성장이라는 핑계로 마음껏 누려 온 자원입니다. 미래의 에너지 체계로 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하죠. 그런데도 전력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 전기료를 올리면 소비자인 기업도 개인도 불편을 호소하고 내 집 마당에 발전소는 더욱 저항합니다. 정부는 모든 소리를 들어주고 피해 다니며 그리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국민을 설득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설득당할 자세는 된 걸까요. 에너지에 ‘지속 가능한’이란 수식을 붙이는 건 정부만의 몫은 아닐 겁니다.


7월인데도 무척 덥습니다. 최근 전력 수급 경보가 곧 발령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나왔습니다. 이 경보는 지난 2013년 8월 이후 발령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독일은 홍수로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증거는 없지만 누구나 기후변화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전기는 앞으로 더 필요할 것이고 재생에너지만으로는 공급이 부족하며 이런 상황에서 원전의 스위치와 석탄에 붙은 불도 꺼야 합니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는 외국 속담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이든 불편과 희생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 기후변화를 보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김병민 한림대학교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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