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도쿄올림픽 성화 도착 행사가 열린 일본 도쿄의 고마자와 올림픽공원 체육관 앞에서 한 여성이 피켓을 든 채 올림픽 개최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도쿄 EPA=연합뉴스
[아시아경제 성기호 기자] 어린 시절 일본은 그야말로 ‘넘사벽’의 나라였다. 친구들이 사용하는 필기구 중 가장 고급은 ‘일제’였으며, 워크맨·CD플레이어·게임기·컴퓨터 등 가장 갖고 싶은 물건도 ‘일제’ 였으니 말이다. 학교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어제 본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으며, 그들의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이 세련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여름방학에 일본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동경과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자랑 하듯 설명하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들의 ‘속내’였다. 당시 어른들은 일본에 대해 ‘무서운 나라’ ‘치밀한 나라’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나라’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그 기반에는 깊이를 알 수 없고 멀리 내다보는 그들의 ‘속내’에 대한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이러한 고정관념이 크게 무너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들의 외교정책이다. 아베 정권 이후 일본 정치인들은 국내적으로 수세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노골적으로 ‘한국 때리기’를 진행하고 있다. 전과 다르게 속내가 뻔히 보이는 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는 도쿄올림픽의 문재인 대통령 방일 문제도 그렇다. 일본 언론은 지난 11일 도쿄올림픽 기간 동안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며, 일본이 한국쪽의 정상회담 개최 제안을 무려 ‘수용’ 했다는 보도를 했다. 또 일본 정부는 문 대통령에 대해 약식회담 정도만 할 수 있으며 특별대우는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즉 한국정부가 일본에 정상회담을 사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정부는 즉각 항의에 나섰다. "협의가 지속되기 어렵다"며 여차하면 판을 깰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일본이 왜 이럴까. 본인들이 별로 불리 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대통령이 도쿄올림픽에 와서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한국 정부가 머리를 숙였다는 대대적인 보도에 나설 것이 뻔하다. 만약에 문 대통령이 도쿄올림픽에 가지 않는다면? 그럼 "세계적인 축제에 한국이 속 좁게 참가하지 않았다" "한국 때문에 올림픽을 망쳤다"라며 한국 책임론을 들고 나올 것이 뻔하다. 아베와 스가로 이어지는 일본 정부는 올림픽에 사활을 걸고 있다. 올림픽이 성공해야 자신들의 집권 이유를 강조할 수 있고, 국내 여론을 결속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 올림픽이 흥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으니 미리 핑계 거리를 찾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도 있다. 정상회담을 한다고 말한 다음에 문 대통령이 도쿄올림픽에 참석하면 일방적으로 정상회담을 개최하지 않는 방법이다. 한국이 정상회담을 구걸하러 왔지만 더 ‘혼내줘야’ 하기 때문에 받아주지 않았다고 내부적으로 홍보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꼭 문 대통령이 도쿄올림픽에 참석해서 자릴 빛내줄 필요가 있을까. 일본내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 다른 나라 정상들은 불참을 속속 선언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물론 일개 기자도 뻔히 보이는 일본의 의도를 우리나라 청와대와 외교부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우리 외교는 일본보다 더 ‘어른스럽게’ 행동해 왔다. 우리 정부가 적절한 방법을 찾을 것이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양국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해법을 내놓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현재의 일본이 얄미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양국의 협력보다 혐한으로 지지율을 챙기는 속내가 빤히 보이는 행동을 반복하니 말이다. 어른들이 말하던 ‘속 깊은’ 일본은 이제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성기호 기자 kihoyey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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