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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기]‘관련 규정에 따랐다’는 말의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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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기]‘관련 규정에 따랐다’는 말의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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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구금과 고문, 성폭행을 당하고 한국으로 피난 온 가족들이 있다. 출입국 당국은 이들에게 ‘난민인정 신청이 명백히 이유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정식 난민심사를 거칠 필요조차 없다고 판단했다. 근거가 뭘까. 법무부는 그 근거가 되는 지침은 제명과 내용이 모두 비공개여서 알려줄 수 없다고 답변했다. 법무부는 심사 보고서 역시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10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인천공항에서 1년 넘게 노숙을 해야 했던 난민 가족은 자신들이 왜 심사도 없이 거부돼야 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아무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규정에 따랐다는 설명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결정을 납득할 수 있을까.


2019년 4월, 외국인보호소에서 공무원들이 한 외국인을 징벌방에 넣고 발목과 손목에 수갑을 채운 후, 두 수갑을 연결하여 사지를 뒤로 결박하고 약 2시간40분 동안 방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관련 규정에 정해지지 않은 장구 사용으로 피해자의 인권이 침해되었다고 판단하고, 법무부 장관과 외국인보호소장 등에게 직무교육 등을 권고했다. 그런데 최근 보호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발목에 수갑 대신 ‘포승’을 묶고, 포승을 다시 손목 수갑과 연결하여 사지를 결박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바뀐 것은 발목에 사용하는 장구의 재질에 불과하다. 해당 보호소 담당자는 ‘관련 규정에 따른 장구를 사용했다’는 말 외에는 해명을 거부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목 수갑은 규정에 없다’고 지적했던 데에 착안하여 이제는 규정에 있는 ‘포승’을 사용하면 그 사용 방식이야 어떻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설마 법 집행을 관장하는 법무부에서 이런 말장난 같은 논리의 곡예를 타면서까지 이미 인권침해로 판단된 행위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는 난민협약 가입국이고,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한 국가이다. 법적으로 대한민국에 도착한 사람이면 누구나 ‘난민인정 신청’을 할 수 있고 여기에는 아무런 자격 제한이 없다. 설사 여권이나 신분증 등이 없더라도 이를 이유로 난민심사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런데 출입국 당국이 별안간 난민법에 ‘입국심사를 받는 때에 난민인정 신청을 하려면’이라는 문구가 있다는 이유로 ‘난민 신청을 하려면 입국심사를 받을 자격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주장의 실험 대상이 된 난민 신청자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이 없었고, 그는 난민신청서를 내보지도 못하고 공항에서 1년2개월을 보냈다. 1심 법원과 2심 법원이 연이어 난민 신청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무부가 문언상 명백해 보이는 조문의 의미를 독창적으로 다투는 사이에, 식량과 의약품이 급했던 난민을 돕기 위해 시민들의 모금이 이어졌다. 법을 어기고 있는 것은 누구였는가.


공익변호사의 일은 결국 불합리한 제도와 법규정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법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이미 존재하는 법령이라도 납득 가능한 상식적인 방식으로 지켜 주기를, 논리의 곡예를 하며 법을 피해가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공개된 규정을 만들고 이를 취지에 맞게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정확히 적용할 때, 그제야 ‘관련 규정에 따랐다’는 말은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한재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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