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 작가가 서울 송파구 잠실동 롯데월드타워 내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디 아더사이드(The Other Side)' 개인전에서 라이브 드로잉을 펼치고 있다.
[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가로 10m의 초대형 도화지가 전시장 벽에 걸렸다. 김정기(46·사진) 작가가 오른쪽에 간이의자와 10여개의 붓, 잉크, 물통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작은 붓펜 하나를 들더니 도화지로 성큼 다가선다. 그의 손이 몇번 움직이자 금세 사람의 얼굴과 팔다리가 쑥쑥 돋아난다. 손놀림이 빨라질수록 그림에 정교함이 더해진다. 작가는 그리는 데 열중하면서도 이를 지켜보는 관람객들과 말까지 주고받는다.
김 작가가 밑그림 없이 머릿속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펼쳐내는 ‘라이브 드로잉’ 장면이다. 그는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롯데월드타워 내 롯데뮤지엄에서 ‘디아더사이드(The Other Side)’ 전시를 열고 있다. 그의 초기 만화작품과 1000여점의 드로잉, 대형 회화, 영상, 사진 등 총 2000여점이 걸려 있다. 김 작가는 정기적으로 전시장을 찾아 라이브 드로잉 퍼포먼스도 선보인다.
김 작가는 라이브 드로잉을 "과정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형 도화지에 라이브 드로잉할 때 듬성듬성 큰 틀의 그림을 미리 구상한다. 하지만 그 사이 배치하는 그림은 즉석으로 그린다. 음악으로 치면 악보에서 잠깐 벗어나 애드리브를 하는 것이다. 김 작가는 "거침없이 그리다 보면 붓을 어디서 멈춰야 잘 끝맺을 수 있을지가 가장 힘들다"며 "채우는 것보다 비워내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새삼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이번에 공개된 김 작가의 주요 신작은 ‘디아더사이드’(2021)와 ‘해님달님’(2021)이다. ‘디아더사이드’의 경우 상하 대칭 구성에 우주복·잠수복을 입은 인물과 동물이 그려져 있다. 이들의 경계는 핑크색 곰인형으로 맞닿아 있다. 곰인형은 유일하게 컬러로 표현됐다. 그림을 90도 회전해 보면 르네상스 시대 거장 미켈란젤로(1475~1564)의 ‘천지창조’가 연상된다.
‘해님달님’은 동명의 전래동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어린 남매가 호랑이를 피해 동아줄 아닌 우주선으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된다. 작가만의 독특한 상상력이 더해졌다.
김 작가에게 상상력의 원천은 만화다. 어렸을 적 꿈도 만화가가 되는 거였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선물로 준 스케치북 표지의 만화 ‘닥터 슬럼프’ 캐릭터에 매료돼 따라 그리면서 꿈을 키웠다.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가 있으면 수백, 수천 번 베껴 그렸다. 그가 즉흥적이면서 빠르게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것도 어린시절부터 대상 형상화 연습을 수없이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2001년 KTF의 간행물 ‘Na’, 2002년 만화 잡지 ‘영 점프’에 ‘퍼니퍼니’를 연재하며 프로 만화가로 입문했다.
그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주최측으로부터 제공받은 전시부스에서 김 작가는 작품은 팔지 않고 나흘 동안 8m 길이 3면 벽에 그림을 그렸다. 그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돼 인지도도 쌓였다. 그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주목받는 작가다. 2015년 4월 영국 런던 크리스티경매에서 그의 원화가 12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김 작가는 만화가로 출발했지만 현재 현대미술과 상업미술 등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는 드렁큰 타이거의 정규 10집 ‘X:리버스 오브 타이거JK’의 앨범 재킷을 디자인했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컬래버 작업도 진행했다. 2008년 베르베르의 단편소설 ‘파라다이스’ 삽화를 그린 이후 2013년 장편소설 ‘제3인류’의 삽화도 작업했다.
이밖에 글로벌 게임회사 블리자드, SM엔터테인먼트 등과도 협업했다. 김 작가는 "넓은 영역을 갖고 여러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이 나의 가장 큰 무기"라며 "잘 그리는 것과는 별개로 창작을 즐기는 작가, 보는 이로 하여금 창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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