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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무너지는 일관성, 서정성으로 돌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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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빈이 그린 '낙원의 밤' 재연, '소나티네' 무라카와와 흡사
죽음 자체에 관념적으로 다가가 "배역으로 사는 시간 즐겨"

[라임라이트]무너지는 일관성, 서정성으로 돌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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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제주 벌판에서 사격을 연습하는 재연(전여빈). 작은 소주병도 백발백중 쏘아 맞히는 명사수다. 무기력한 얼굴로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 돌연 자기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눈다. 멀리서 담배를 피우던 태구(엄태구)가 놀라 다가온다. "저기요, 어이. 어이, 저기요. 잠깐만. 왜 이러세요. 지금 뭐 하세요. 진정하고." 재연은 태구를 태연하게 쳐다보더니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이어지는 정적. 어안이 벙벙해 외마디 소리도 내지 못하는 태구. 재연은 무안할 만큼 빤히 쳐다보며 지나간다.


영화 ‘낙원의 밤’에서 전여빈이 연기한 재연은 허무주의자다. 조폭에게 가족을 잃었다. 그 충격으로 병이 생겨 시한부 인생을 산다. 전여빈은 슬픈 얼굴을 짓지 않는다. 오히려 무표정한 민낯을 드러낸다. 일본 영화 ‘소나티네’에서 걸핏하면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는 무라카와(기타노 다케시) 같다. 무감각하게 총을 난사할 만큼 폭력적인 행위에서 선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죽는 걸 두려워하면 죽고 싶어진다는 역설적인 마음마저 닮았다. "무섭지 않으면 총을 쓰지 않지. 무서우니까 총을 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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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빈은 "사람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는, 무심한 친구로 나타나길 바랐다"고 말했다. "다가오는 죽음마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배역이다. 최종본에서는 삭제됐으나 가족 잃은 충격으로 불치병을 얻고 기뻐하는 장면도 있었다. 자기가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가족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사실에 초연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반적인 누아르에 등장하는 여성 배역과 다르게 그릴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자기 죽음에 개의치 않으며 복수를 꿈꾸는 여인이랄까?"


흔들림 없는 눈빛은 태구와 가까워질수록 부드러워진다. 오랫동안 잊었던 웃음도 되찾는다. 그런데 재연과 태구는 그만큼 유대를 쌓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태구에게는 약점을 메울 여지가 있다. 그는 재연처럼 아팠던 누나(장영남)를 잃었다. 쿠토(이기영)와 재연의 관계에서 죽임을 당한 조카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반면 재연은 태구에게 이입될 구석이 거의 없다. 그래서 태구의 불행에 드러내는 슬픔이 위태롭게 나타난다. 급작스러운 유대 관계가 재연의 참혹한 복수를 위한 전주로만 기능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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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전여빈이 그려온 재연은 일관성을 상실해버린다. 과잉된 감정으로 비극적 결말을 강조하는가 하면, 진지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코미디를 보여준다. 죽음 자체를 관념적으로 들여다보던 특성은 온데간데없다. 고통스러워하는 태구의 모습이 길게 조명될수록 죽음의 부산물에 매몰될 뿐이다. 마지막에 드러내는 편안하면서도 슬픈 얼굴마저 모호해진다.

"모든 사건을 마무리하고 고요의 시간을 가진다고 봤다. 그래서 광대한 바다를 눈에 담는다고 생각했고. 더는 자기가 할 일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복수만으로는 해방되지 않는 분노와 세상으로부터 깨끗이 사라질 수 있다는 편안함이 모두 드러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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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가능성을 확보한 건 전여빈이 가진 서정성 덕이다. 그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 ‘죄 많은 소녀(2018)’ 등 독립영화에서 감정을 절제하고 배역의 심리를 내면화하는 데 탁월했다. 영화 속 배역으로 사는 시간을 즐기는 배우다.


"제주도라는 낯선 공간에서 촬영해서인지 개인적 삶을 쉽게 분리할 수 있었다. 주르르하는 빗소리만 들어도 금세 재연으로 돌아간 듯하다. 깊게 스며들지 않았다면 감정적으로 힘든 신들을 해내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만난 재연이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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