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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배우 윤여정의 시작…시대적 욕망 품은 식모 '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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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감독 영화 '화녀' 50년 만에 재개봉…근대성에 대한 매혹·환멸
계층 갈등 치명적 암투극으로 그려…윤여정 자유분방한 에너지 돋보여

[이종길의 영화읽기]배우 윤여정의 시작…시대적 욕망 품은 식모 '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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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을 저의 첫 감독인 김기영(1919~1998)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배우 윤여정(74)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이다. 영화 데뷔작은 다음 달 1일 재개봉하는 ‘화녀(1971).’ 김기영 감독이 1960년작 ‘하녀’를 1970년대에 맞게 다시 만들었다. 같은 이야기를 1982년 ‘화녀 82’에서도 풀어내며 10년 주기로 바뀐 한국 사회와 중산층 가정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화녀’에 나오기 전까지 윤여정은 무명배우였다. 김 감독은 MBC 드라마 ‘동두천 백바지’에서 윤여정의 여고생 깡패 연기를 보고 주연으로 섭외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난 미남미녀를 놓고 그 역할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내 작품에 맞는 배우를 찾는다. 그러면 대개 성공을 거둔다"라고 말했다.

"‘황혼열차(1957)’에 캐스팅한 김지미 같은 배우가 극 속에서 고생하면 이런 역효과가 생긴다. ‘저렇게 예쁜 여자도 남자들 때문에 고생하니 우리 같은 건 어떻게 하느냐.’ 여배우란 보통여자가 제일 좋다. 예쁜 건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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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녀’의 근간은 식모가 주인집 아이를 저수지에 빠뜨려 죽인 금촌 살인사건이다. 김 감독은 단순히 여자 때문에 한 가정이 붕괴하는 이야기로 그리지 않았다. 서구 상품 물신에 사로잡힌 중산층 부부와 성적인 유혹으로 계급상승을 꿈꾸는 하층계급 여성이 벌이는 치명적인 암투극으로 표현했다. 앤틱한 시계,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페티시적 미장센을 조성하며 근대성에 대한 매혹과 환멸을 가리켰다.


윤여정이 연기한 식모 명자는 개별적이거나 사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전형적이고 상징적이다. 이는 뭔가를 정의하는 대사가 많은 영화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다. 배역들이 하나같이 현실에서 추출한 계층적 성분을 내포한다. "남자가 애를 낳게 된다면, 남자들은 아마 겁이 나서 대개 자살을 할 거라고 말이야." "정말이에요. 남자들은 겁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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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가 드러내는 계급상승에 대한 욕망은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에서 자주 나타난다. 충족에 대가가 따르므로 사실상 죽음의 공간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2007년 펴낸 책 ‘전설의 낙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급상승을 욕망하고 추락 공포를 야기하는 이곳은 어둡고 음산하다. 욕망이 총천연색이라면 응징은 검은색인 것이다. 죄 없는 아이들이 굴러떨어지고 의문의 침입자들이 죽어가는 이곳은 한 계층이 다른 계층과 공멸하는 김기영식 수직구조 내러티브의 성지이기도 하다."


얼핏 보기에 명자는 중산층 가정의 질서를 위협하는 괴물 같다. 하지만 ‘화녀’에서 나타나는 공포는 주로 가장의 몰락과 그에 따른 가정의 위기로부터 분출된다. 침입자로 인해 불거질 뿐, 이미 내부에서 자라고 있던 요소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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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은 한국 사회는 물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병리적 증상을 집어낸다. 여러 갈래를 통해 형상화하는데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이 윤여정의 자유분방한 에너지다. 익살스럽게 쥐꼬리를 잡고는 집주인 정숙(전계현) 앞에서 흔들어댄다. "이것도 닭모이 되죠? 동물성이니까요." "얘, 저리 치워라. 너는 무섭지도 않니?" "촌에서 쥐잡기 주간에 약을 놓아서 여든 마리를 잡아 상을 탔는걸요."


그 뒤에 숨겨진 광기는 남자들을 위태로운 욕망의 심연으로 밀어낸다. 그것을 유도하는 동력이 그 사회의 불온한 정상성이라면 환호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김 감독이 ‘하녀’ 시리즈를 만든 이유일 수 있겠다.


"남자들이 여자의 가슴에 칼을 몇 번 꽂으면 모두 악마가 되어 복수하게 되는 것이다. (…) 여자들은 남편이 죽으면 20년 동안 자유롭고 멋있게 살지만, 남자들은 마누라 죽으면 2년 이상 못 산다. 살아봐야 큰소리 꽝 치지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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