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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기]진술의 신빙성과 상식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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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기]진술의 신빙성과 상식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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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필자가 A를 의뢰인으로 만난 것은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A의 난민신청 조사를 담당한 공무원은 짧은 면담 끝에 이런 말을 했다. "A 말은 가짜예요. 애들이 방에서 자고 있는 동안 거실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아요." 하지만 필자가 만난 A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A의 진술은 무척 일관됐고 구체적이었다. 폭행을 당했던 사실을 말할 때마다 A는 온몸을 떨었고, 매번 고통스럽게 울었다. A는 폭행 피해로 인해 몸이 성치 않았는데, 몇 달간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했고 진통제나 항생제만 먹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기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필자의 상식과, 비행기로 수십 시간이 걸리는 나라에서 온 A의 상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법무부는 결국 A의 난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인정사유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신청인의 진술을 신뢰하기 어려움.’ 뒤늦게 난민인정을 받은 이들이 난민신청 과정에서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A의 수년간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또 다른 의뢰인 B는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이고 지적장애인이다. B와 관련된 몇 가지 기억이 있다. 경찰은 B의 사건을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변호사로 선임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검사와 면담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당시 가해자는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30분이 넘게 내 말을 듣던 검사는 면담 끝에 이렇게 말했다. "가해자가 정말 나쁜 놈이죠. 피해자가 비장애인이었다면 이렇게 했겠어요?" 가해자는 사람들이 피해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고, 그 의도는 적중했다. 적어도 경찰은 가해자의 손을 들어 주었고, 가만히 있다가는 검찰에서도 같은 결론이 날 게 분명해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검찰은 가해자를 기소했고, B는 난생처음 법정에서 증언을 하게 됐다. B는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했는데, 가해자가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섰지만 생각보다도 더 딱딱하고 엄숙한 법정의 모습에 B는 다소 놀란 모습이었다. 당황한 B는 판사와 검사의 질문에 아는 만큼 대답하지 못했다. 증언을 마치고 돌아가는 B의 모습은 퍽 의기소침해 보였다. 재판장은 B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진술의 신빙성은 수많은 피해자들을 괴롭게 하는 말이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고, 고통을 끄집어내고 상처를 할퀴어 가며 진술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틀린 진술을 하기도 하고, 과장된 진술을 하기도 하고, 또 이전과 다른 진술을 하기도 한다. 억울해서일 수도 있고, 기억이 달라져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꼬투리를 잡아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해 버리곤 한다. ‘당신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고로 당신의 피해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필자는 종종 변호사는 일상의 언어를 법의 언어로 바꾸는 통역사 같은 직업이라고 생각해 왔다. 의뢰인들의 말을 검사와 판사가, 혹은 우리 사회가 믿을 수 있게 설득하는 것이 변호사가 하는 일이다. A는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난민이기에, B는 지적장애인이기에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더 공을 들이고 노력하지 않으면 진술을 이끌어내기조차 어렵다. 어렵게 꺼낸 말은 또 다른 벽에 부딪힌다. 그들의 말이 ‘일반인’의 상식과 경험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모든 피해자는 일반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만 더 공정한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최초록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한진주 기자 truepear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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