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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아메리칸 드림의 절망, 기어코 뿌리내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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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아이작 정 감독 영화 '미나리'
경제적 성공을 원하는 남편, 교육·의료 환경 먼저인 아내
이민자 가족 갈등 극복 과정 그려…할머니가 키운 미나리 희망 상징

[이종길의 영화읽기]아메리칸 드림의 절망, 기어코 뿌리내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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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칸소주는 우리에게 낯선 행정구역이다. 이름이 생소하고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다. 현지 자동차 번호판에는 ‘자연의 주’라고 적혀 있다. 별명도 ‘해바라기 주’라서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듯하다. 아칸소(Arkansas)는 캔사족 말이다. 강 하류에 사는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인들이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


영화 ‘미나리’의 제이콥(스티븐 연)·모니카(한예리) 부부도 농사를 시작한다.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은 이들이 캘리포니아주에서 건너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병아리 감별만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었다는 대화만 들려준다. 제이콥은 경제적 성공을 원한다. 모니카는 교육·의료 환경이 먼저다. 동상이몽은 농가들이 모인 외진 촌락에서 갈등으로 심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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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한국적 이야기


부부갈등을 둘러싼 사실적 접근은 미국적일 수밖에 없다. 이 나라가 여러 민족과 인종의 이민을 통해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조국은 미국 아닌 다른 나라. 거주지와 시민권만 공유하는 사람들로 구성돼 하나의 공통적인 역사나 문화가 없다. 이런 경향은 1965년 이민의 국가별 인원 할당, 다시 말해 쿼터제가 폐지되면서 더 짙어졌다.


쿼터제 폐지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다. 1970년 미국의 백인 인구는 전체 인구 중 88%를 차지했다. 히스패닉·아시아계는 1.4%에 그쳤다. 하지만 ‘미나리’의 배경인 1980년 조사에서 백인은 83%로 줄고, 히스패닉·아시아계는 7.1%로 늘었다. 오는 2050년에는 백인이 53%, 히스패닉계가 24%, 아시아계가 9%로 전망된다.

미국인들은 인종·문화적 다양성에도 하나의 국가로 통일성을 유지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전방위적 반이민 정책으로 분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서로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며 섞여 살아간다. 그 사이 이민자들은 토착화한 기존 미국 사회에 완전히 동화하거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미국인이 됐다. 제이콥·모니카 부부는 후자다. ‘미나리’가 우리에게도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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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


제이콥은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한다. 농사에는 트랙터를 배달해준 폴(윌 패튼)이 함께한다. 폴은 첫 만남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면 잠도 안 자고 열심히 일할게. 나 일 잘해. (…) 너를 본 잠깐 동안 우리가 친구가 될 거라는 걸 알았어. 기도해도 될까?" "뭐라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 가족을 축복해주세요. 이 신성한 만남을 축복해주세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메리칸 드림의 근간이었던 프로테스탄트의 전형이다. 강고한 노동과 금욕적 자세를 모두 보인다. 폴은 자기를 통제하며 삶에 엄격하고 냉정한 태도가 유지돼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술·담배를 멀리하고 주일마다 십자가를 매고 걸으며 회개한다. 그는 고된 노동으로 자기 신앙을 확증하기도 한다. 당시 개신교에서는 부(富)를 좇는 활동이 권장됐다. 하느님의 영광을 높이는 게 목적이었다. 세속적 금욕주의에 대해 강조하며 이윤 추구를 하느님의 뜻으로 여겼다.


숭고한 개념의 가치는 상실한 지 오래다. 폴은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다. "저기 십자가 남자네." "얼굴에 더러운 상처가 있고 대야에다 똥을 싼데." 자본주의가 본격화하면서 이민자들이 일군 성과는 무시되기에 이르렀다. 트럼프 정부의 인종적 편견 조장으로 사회분열 양상까지 보인다. 그렇게 아메리칸 드림은 옛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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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부부


제이콥은 농사에 실패해도 계속 도전한다. 모니카가 만류해보지만 아칸소주에 남겠다고 고집한다. "같이 가면 안 돼? 나 당신 없이는 안 돼." "떠나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야. (…) 애들도 한 번쯤은 아빠가 뭔가 해내는 걸 봐야 할 거 아니야." "뭘 위해서. 우리가 함께 있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니야?" "당신은 가서 그냥 하고 싶은 거 해. 나는 다 잃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내가 시작한 걸 끝내야겠어."


기러기 남편 선언은 예고된 결단이다. 그는 아들 데이비드(앨런 김)가 병아리 부화장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저게 뭐에요?"라고 묻자 이렇게 말한다. "수놈들을 저기서 폐기하는 거야. (…) 수놈은 맛이 없어. 알도 못 낳고. 아무 쓸모가 없어. 그러니까 너는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거야." 데이비드가 외할머니 순자(윤여정)에게 받는 화투도 같은 암시를 던진다. 정 감독은 8월 공산명월(空山明月) 화투장을 클로즈업 샷으로 비춘다. 기러기가 지나가는 억새밭이 검게 그려져 있다.


본래 기러기는 부부 금실의 상징이다. 한 번 짝을 맺으면 갈라서는 법이 없다. 혼자된 사람을 ‘짝 잃은 외기러기’라고 부를 정도다. 한 쪽이 목숨을 잃으면 살아남은 쪽은 죽을 때까지 혼자 산다고 한다. 제이콥·모니카 부부가 결혼하면서 했던 말만 계속 곱씹는 건 그런 기러기 부부를 꿈꿨기 때문이 아닐까.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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