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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변방의 장수 정신용 없었으면…영웅 강감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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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 1차 침입 서희의 강동 담판
1010년 2차땐 양규 기병대가 막아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학 교수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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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은 약 30년에 걸쳐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거란의 침입을 6차까지 세분화해서 보기도 하지만 보통 3차 침입으로 이해한다. 993년 1차 침입을 시작으로 1010년 2차 침입에 이어 1018년 3차 침입까지 이뤄졌다. 거란의 1차 침입에서 서희가 강동(江東) 6주(州)를 획득했고 2차 침입에서 양규의 기병대가 활약했으며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크게 승리했다.


고려-거란 전쟁 하면 흔히 서희·양규·강감찬을 떠올린다. 그런데 거란의 2차 침입과 3차 침입 사이에 활약한 정신용(鄭神勇)이라는 인물이 있다. 정신용은 1014~1015년 거란의 침입 당시 전사한 인물이다.

1014년 9월13일 거란의 이송무(李松茂)가 강동 6성의 반환을 요구했다. 고려에서 별 반응이 없자 10월6일 거란의 소적렬(蕭敵烈)이 통주(通州)를 침략했다. 이때 흥화진(興化鎭)의 장군 정신용이 별장(別將) 주연(主演)과 함께 거란군을 패퇴시켰다. 이때 거란군 700여명의 목이 날아가고 강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란군의 침입은 이듬해까지 지속됐다. 1015년 1월22일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했다. 이때 장군 고적여(高積餘)와 조익 등이 거란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1월23일 거란군은 다시 통주를 공격했다. 하루 차이로 거란군이 통주를 공격한 점을 볼 때 거란군 일부가 흥화진 포위에 나선 사이 주력군은 그대로 남하한 듯하다. 결국 봄이 지나자 거란군은 물러갔다. 7월13일 포상이 실시됐다.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장군 정신용과 임영함(林英含) 그리고 군사 1만2500여인이 모두 변방을 지킨 공이 있으므로 관급(官級)을 높여 포상해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고려 국왕 현종은 이를 허락했다. 물론 1만2500여명 전원의 관급이 높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장군 2명은 관급이 오르고 나머지 군사들의 경우 개인 포상을 받았을 것이다.

앞서 고려가 획득한 강동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다. 각 성의 둘레는 흥화진 699간(약 1.3㎞), 용주 1573간(약 2.8㎞), 철주 789간(약 1.4㎞), 귀주 1507간(약 2.7㎞), 곽주 787간(약 1.4㎞)이다.


흥화진은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이다. 관문 격인 흥화진을 지나면 교통로상 통주가 그 중심에 있다. 통주를 기준으로 동북쪽에 귀주, 남동쪽에 곽주, 서북쪽에 철주와 용주가 위치했다. 거란군이 흥화진 통과 후 줄기차게 통주를 공격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1010년 2차 침입 당시 거란군과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군의 대규모 회전(會戰)도 통주에서 발생했다.


1015년 이송무 강동6성 재요구에
고려 관문 흥화진 지키던 정신용
적군 700여명 사살했지만 전사
1018년 강감찬 대승의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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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침입은 가을이 되자 다시 시작됐다. 1015년 9월7일 거란의 이송무가 강동 6성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불과 5일 만인 9월12일 다시 통주를 공격했다. 9월16일 흥화진의 대장군 정신용, 별장 주연,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校尉) 양춘(陽春), 태의승(太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潁) 등이 거란군의 후미를 타격했다. 거란군 700여명을 사살했지만 결국 정신용 등 6명은 전사하고 말았다.


9월20일 거란군은 청천강 이남의 영주성(寧州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9월23일 대장군 고적여, 장군 소충현(蘇忠玄)·고연적(高延迪), 산원 김극(金克), 별장 광참(光參) 등이 거란군을 추격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거란군은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좌(王佐), 녹사(錄事) 노현좌(盧玄佐)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1014~1015년 거란의 침입은 1·2·3차에 비해 간략히 기록돼 있다. 당시 고려의 대장군 정신용·고적여, 장군 소충현·고연적 등이 전사한 데다 병마판관까지 포로가 됐다.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긴 했지만 인적 손실이 컸다. 철수하는 거란군을 추격하긴 했다. 그러나 오히려 참담한 패배를 당했기에 기록 자체가 적을지도 모른다.


‘요사(遼史)’ 중 ‘식화지(食貨志)’에 "거란군은 행군하다 적의 성에 이르러 방어가 견고해 공격할 수 없으면 활을 쏘면서 요란하게 북을 치며 거짓으로 공격한다"고 적혀 있다. "적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앞길이 막힐 염려가 없으므로 군사를 이끌고 전진한다"고 돼 있다. 다시 말해 기병 중심으로 기동전을 전개하기 위해 일부 견제 병력만 남겨두고 주력은 빠르게 진격하는 것이다.


1014~1015년 전투는 고려의 인적 손실이 컸기에 ‘상처뿐인 승리’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투의 전체 국면에서 볼 때 고려군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다. 1014년 10월6일 거란군이 통주 공격에 나서자 흥화진의 정신용 군사들이 거란군 후미를 타격했다. 결국 거란군은 철수하고 말았다. 1015년 1월22일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포위하고 23일 주력 병력이 통주 공격에 나섰다. 이때 고적여 군사들이 흥화진의 포위를 풀었다. 거란군은 결국 통주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1015년 9월12일 거란군이 다시 통주를 공격했다. 이에 16일 흥화진의 정신용 군사들이 거란군의 후미를 타격했다. 이때는 1014년 전투와 달리 거란군도 어느 정도 대비가 돼 있던 것 같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정신용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흥화진 군사들의 공격으로 거란군도 더는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다. 9월20일 거란군 선봉은 청천강 건너 영주성(안주)을 공격하고 있었다. 후방의 보급로와 퇴각로가 위험해지자 거란군은 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015년 9월20일 거란군의 영주성 공격은 이들이 강동 6주를 돌파하고 청천강 이남으로 진격한 상황에서 단행된 것이다. 여기서 흥화진의 정신용 군사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면 청천강 이북은 거란군 손아귀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고려의 관문 흥화진이 쉽게 함락당하지 않아 전투 양상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양규가 흥화진에 주둔하고 있다가 거란군 후방을 교란했다.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강감찬이 흥화진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렇듯 흥화진은 거란과 치른 전쟁에서 최선봉 거점이자 전략 요충지였다.


현종, 정신용家에 이례적 토지 하사
고려 조정이 武功 특별히 기려

1014~1015년 거란의 침입이 종결됐다. 1016년 1월10일 고려 현종은 정신용 등 군공자들을 포상했다. 정신용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상주국(上柱國)으로, 주연을 장군으로, 임억을 중랑장(中郞將)으로, 양춘을 낭장(郞將)으로, 손간을 상약봉어(尙藥奉御)로, 강승영을 태사령(太史令)으로 추증했다. 모두 1015년 9월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이다. 아울러 정신용의 아들 정균백(鄭均伯)을 낭장 겸 상승봉어(尙乘奉御)로 임명했다.


정신용에게 추증된 상서우복야는 상서성의 실질 장관으로 정2품에 해당한다. 상주국은 전공자에게 부여되는 훈작(勳爵)으로 최상위급이다. 고려 현종 시기에 추증된 많은 군공 포상 사례 가운데 최고위직이다. 그런데 1015년 9월 전투에서 대장군 고적여, 장군 소충현·고연적도 전사했다. 이들에 대한 포상은 1016년 7월2일이 돼서야 도병마사의 건의로 추진됐다.


1016년 11월1일 고려 현종은 정신용 집에 양전(良田) 20결을 하사했다. 당시 군공에 대한 포상으로 관함(官銜)이나 곡물이 아니라 토지를 지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후 거란의 침입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1020년 3월16일이다. 현종은 정신용 집에 다시 곡식 300석을 특별히 하사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종과 고려 정부가 정신용의 무공(武功)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014~1015년 거란의 침입과 정신용의 활약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당시 고려에서 정신용 장군은 전쟁 영웅이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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