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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홀로코스트의 음악' 왜 광주서 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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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과 클래식

한정호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한정호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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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가 밝을 때만 해도 클래식 음악계는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계획으로 들떴다. 지난달 100주년을 맞은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유태계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빗이 베토벤 소나타 32곡 전곡을 연주했지만, 코로나 여파로 지역을 불문하고 베토벤 작품을 아우르는 시도는 대부분 무산됐다. 역설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생몰 기념해를 이용해 작곡가를 상업적으로 다룬 관행을 돌아보게 한다.


반면, 나치 학살 수용소의 해방 75주년을 기리는 조용한 움직임은 꾸준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월 26일 미사에서 "기억을 잃으면 미래가 파괴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에 대한 후세의 기억을 호소했다. 국제 아우슈비츠 위원회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어 '기억의 물품'(Gift of Remembrance)을 레빗에게 수여했다.

러시아 태생이지만 독일에서 자란 레빗은 수상식에서 현실 정치로 진입하려는 극우 신나치주의, 반(反)유태주의를 맹비난했다. 연초 실시된 독일 내 여론조사에선 설문에 응한 15세 전후 청소년의 약 40%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의미를 몰랐다. 메르켈, 프란치스코 교황, 레빗은 각자 위치와 직분에서 대량 학살 문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는 흐름에 저항한다.


독일 철학자 테어도어 아도르노(1903~1969)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이라고 일갈한 이후 독일과 프랑스 예술계는 수용소 문제를 주로 문학과 연극, 영화로 다뤘다. 프랑스 문학가 장 케이롤(1911~2005)은 "문학의 본질은 사라짐"으로 규정해 아도르노에게 맞섰고, 예술이 그릴 현실 범위를 확장하려면 역사 이해에 기반한 예술계 성찰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수용소 예술화 문제를 연구한 이상빈 한국동서비교문학회장은 영국과 미국 등 2차대전 전승국은 예술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쇼아(Shoah·히브리어 대재앙)의 미학화에 자유로운 반면, 독일과 프랑스는 허구적 요소가 개입되는 문학과 영화를 통한 미학적 접근에 거부 반응이 심한 현실을 지적했다. 유태계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는 회고록, 일기 방식의 자서전적 텍스트에서 수용소 기억의 왜곡 가능성을 제기했다.

음악은 문학, 영화에 비해 수용소 담론에서 사실과 허구 사이의 미메시스 충돌에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수용소를 체험하지 않은 동일한 상황에서 문학가 로맹 가리(1914~1980)는 상상력에 의존한 반면, 레빗은 "현재는 과거를 대하는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입장에서 아우슈비츠와 베토벤을 마주한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후 반(反)유태주의를 맹비난하고 나선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빗. (C) Robbie Lawrence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후 반(反)유태주의를 맹비난하고 나선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빗. (C) Robbie Law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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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 묻힌 베토벤 탄생 기념보다 수용소 비극, 후세에 기억 움직임 거세
新나치주의反·유태주의 맹비난…유태계 피아니스트 레빗 학살 문제·망각에 저항

레빗은 2018년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유럽 음악계의 갈등 중심에 섰다. 2018년 4월 유럽판 그래미상으로 평가된 '에효(Echo)'상이 힙합 부문 수상자로 가사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자를 비하한 콜레가와 파리드 뱅을 선정하자 레빗이 시상식 폐지 운동에 나섰다. 유태계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르노 카퓌송이 함께 했고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과거 에효 클라식상 수상 기록을 프로필에서 뺐다. 이들의 항의로 에효상은 2018년 폐지됐고 새롭게 오퍼스 클라식상이 제정됐다.


레빗은 독일에 온 이민자 그룹 가운데 힙합신에서 반나치 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기존 질서에 비아냥과 도발을 제기하는 랩과 힙합의 범주에 아우슈비츠 소재는 불가침의 영역인가의 논쟁이 잠시 누그러진 상태다.


클래식계에 잘 알려진 수용소 관련 작은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의 '세상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다. 메시앙이 프랑스군으로 복무하던 1940년 독일군 포로로 잡혀 괴를리츠 수용소에 수감됐을 때 지은 작품이다. 수용소는 오락에 관대해 막사에 오케스트라와 재즈 밴드도 존재했고 메시앙의 과거 명성이 알려지자 작곡에 집중하도록 특별 관리동에 이감됐다. 메시앙은 수용소에서 수급이 가능한 첼로, 바이올린, 클라리넷, 피아노로 4중주곡을 완성했고 수용자들을 상대로 초연이 이뤄졌다.

올리비에 메시앙은 집단 수용소에서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작곡·연주했다. (C) Classical Music Indy

올리비에 메시앙은 집단 수용소에서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작곡·연주했다. (C) Classical Music I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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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뒤늦게 재조명 받는 아우슈비츠 희생자는 체코 작곡가 파벨 하스(1899~1944)다. 실내악부터 교향곡, 오페라까지 다양한 규격에서 여러 스타일을 시도했지만 나치는 '퇴폐적 작곡가'로 규정했고 1941년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됐다. 수감 기간 작곡과 지휘 활동이 가능했지만 하스는 나치 선전용 영화 음악을 쓴 직후 가스실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평소 천식을 앓아 대기열에서 기침을 하다가 화를 당했다고 같은 줄에 있던 지휘자 카렐 안체를(1908~1973)이 증언했다. 안체를은 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본인만 생존했다. 체코 출신 음악인으로 결성된 파벨 하스 4중주단의 성장과 함께 하스의 존재도 부각된다.


체코 실레지안 출신의 작곡가 빅토르 울만(1898~1944) 역시 파벨 하스처럼 음반과 공연으로 뒤늦게 주목 받는다. 하스처럼 퇴폐 음악가로 나치에 낙인 찍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7편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1~4번은 프라하에서, 5~7번은 수용소에서 작곡했다. 수용소 수감 전에는 쇤베르크를 사사했지만 무조주의 성향이 짙지 않고 말러, 모차르트에 대한 경외를 피아노에 담았다. 음악가들은 활자 기록 대신 악보로 남긴 자취에서 울만의 행적을 차분하게 조망할 수 있다.


폴란드 출신의 옛 소련 작곡가 미에치슬라프 바인베르크(1919~1996) 작품도 수용소 문제와 결부되어 빛을 본다. 2010년 브레겐츠 음악제는 테오도르 쿠렌치스 지휘로 바인베르크 오페라 '승객'을 상연했다. 작품은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조피아 포스미시 희곡을 원작으로 2차대전 종전 후 브라질로 건너가는 배에서 만난 두 여인의 관계(간수-수감자)를 그린 작품이다. 바인베르크는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소련으로 망명했고 가족을 모두 홀로코스트로 잃었다.

바인베르크 오페라 '승객'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두 여인의 긴장을 다룬다. (C) Lynn Lane

바인베르크 오페라 '승객'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두 여인의 긴장을 다룬다. (C) Lynn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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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집단 수용소에서 음악은 여러 목적으로 혼용됐다. 유태인 멸종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집단 거주지인 게토와 학살이 자행되는 수용소 사이에 쓰인 음악의 성격이 서로 다르다. 수용소에 수감자들이 도착하면 하차 장소에선 음악가들이 이들을 환영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 레하르의 '메리 위도우'를 연주했다. 수감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여기도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인식을 나치는 음악으로 주입했다.


일터에 나갈 때 슈베르트 군대 행진곡이 반복 연주될 때 친위대원들은 직무인 살육 행위의 죄책감을 잠시 잊었다. '음악'이라는 세련된 문화를 통해 나치는 보호하고픈 가치를 유지했다. 나치에 수용소에서의 음악은 운영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수용소 음악이 단순히 비극적 현실을 초극하는 '정신적 저항의 상징'이라는 신화를 깬 역사가의 연구가 뒤따른다. 미국 사우샘프턴대 역사학 교수 셔릴 길버트는 저서 '홀로코스트의 음악'에서 음악을 '수용소 안의 사람들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정의했다. 길버트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언하기 위해 목소리의 기억 창고로 노래가 필요했다"는 점에 유의했다. '증언'할 세대가 사라진 다음 '기억' '애도'의 시기를 거쳐 '역사' 시기에 다다를 때 예술은 도덕적 차원에서 '기억의 의무' 이외에 아우슈비츠의 과거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지 장르마다 미학적 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국내에서 아우슈비츠 문제를 다룬 음악 이벤트는 드물다. 지난해 12월 광주시향이 '홀로코스트와 음악-나치 희생자의 음악'을 주제로 특별 공연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숨진 작곡가 파벨 하스, 한스 크라사(1899~1944) 작품이 다뤄졌고 기획에 참여한 최유준 전남대 교수는 "수용소에서 죽음을 앞두고 만들어낸 음악들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사유를 제공한다"는 점을 짚었다.


클래식 음악가들부터 국내에서 음악과 인간성을 고민하고 성찰할 기회를 찾는다면, 민주항쟁의 경험을 음악적 '로컬리티'로 담아낼 광주가 여러모로 최적의 장소다.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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