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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비폭력·대화의 길 걸었던 '검은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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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 포에버" 배우 채드윅 보스만

[라임라이트]비폭력·대화의 길 걸었던 '검은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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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몰래 항암치료 견디며 영화 일곱 편, 실존인물 연기 통해 연대·참여 제시

'블랙팬서' 통해서는 평화 정신 강조…아프리카 문화·가치의 자긍심 역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결장암으로 사망한 배우 채드윅 보스만은 슈퍼 히어로였다. 영화 ‘블랙팬서(2018)’에서 비브라늄 슈트 차림으로 세계를 구해서가 아니다. 남 몰래 항암 치료를 받으며 영화 일곱 편에 출연했다. ‘마셜(2017)’, ‘블랙팬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21 브릿지: 테러 셧다운(2019)’, ‘Da 5 블러드(2020)’, ‘마 레이니의 검은 엉덩이(2020).’ 묵묵히 표현한 배역들은 하나같이 거인적인 발자취다. 흑인 사회에 희망을 제시해 연대의식과 참여를 끌어냈다.

보스만은 실존 인물을 자주 그렸다. ‘42(2013)’의 재키 로빈슨(1919~1972)이 대표적인 예. 백인 선수들로 가득한 메이저리그에서 명예의 전당까지 오른 흑인 선수다. 제목인 ‘42’는 등 번호. 1997년 전 구단 영구결번이 됐다. ‘재키 로빈슨 데이(4월 15일)’에 선수들은 빠짐없이 42번을 달고 경기한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해 8월 28일로 미뤄졌다. 1963년 워싱턴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행진이 벌어진 날이다.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는 25만 군중 앞에서 역설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 우리의 창의적 항거가 폭력으로 변질이 돼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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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만은 비폭력 저항의 어려움을 여실히 전한다. 특히 벤 채프먼 필라델피아 감독(알란 터딕)의 비아냥에 뜬공으로 물러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건 백인들의 경기야. 이 무식한 원숭이야”라는 폭언을 듣고도 대응하지 않는다. 끓어오르는 울분은 아무도 없는 더그아웃 복도에서 폭발한다. 배트로 벽을 꽝꽝 내리치며 목이 찢어지게 고함 지른다. 분풀이를 목격한 브랜치 릭키 단장(해리슨 포드)은 “참아야 한다”고 한다.

“이런 것까지 참으라고요?” “그놈들은 계속 그렇게 살라고 해.”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내가 무슨 성자인 줄 알아요?” “이미 (메이저리그에) 발을 들였잖아. 자네는 응원하는 사람들에게서 등 돌릴 권리가 없다네. 자네를 믿고 존경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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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키 단장은 로빈슨에게 비폭력 저항의 가치도 알려준다. 부상한 로빈슨을 찾아가 아침 공터에서 봤다는 백인 꼬마 이야기를 꺼낸다. “배트를 휘두르더군.” “속구라도 기다렸나요?” “자네 흉내를 내더군. 손에 흙을 문지르고 팔을 쭉 뻗어 자네 흉내를 냈어. 백인 꼬마가 흑인인 척 한 거지.”


보스만은 고원한 이상을 법정에서 실천한 서드굿 마셜(1908~1993)도 연기했다. 영화 ‘마셜’에서 백인 여성 강간 혐의로 구금된 흑인 운전기사 조셉 스펠(스털링 K. 브라운)의 누명을 벗겨준다. 직접 변호할 수 없는 극적 상황에서도 차분한 얼굴로 정의사회 구현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법정을 빠져나오는 마셜에게 한 기자가 묻는다. “흑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다는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성명에 동의하는냐?” 그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며 되묻는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나요? 피고인이 지목한 변호사를 거부했는데 공정한 재판이라뇨? 같은 인종 사람이 배심원단에서 배제됐어요. 인종에 대한 공포와 편견이 사건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 헌법은 우리를 위해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적용되게 할 겁니다. 지금부터 헌법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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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은 1967년 흑인 최초로 연방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킹 목사는 전보를 보내 “귀하는 자신의 분야에서 거물임을 입증했고, 귀하의 경력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입니다”라고 칭송했다.


보스만이 ‘블랙팬서’에서 연기한 티찰라는 그 숭고한 정신의 계승자다. 흑인해방과 복수를 위해 피바람을 예고하는 사촌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에게 맞서 싸운다. 평화적인 대화와 비폭력만이 세상을 구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대립은 흑인 민권운동가 케네스 클라크 박사(1914~2005)가 1963년 진행한 TV 토론 ‘흑인과 미국의 약속’에 출연해 격론한 맬컴 엑스(1925∼1965)와 킹 목사를 연상케 한다.


“세계에 우리처럼 생긴 20억 명이 힘겹게 사는데 와칸다에는 그들을 해방할 도구가 있지.” “무슨 도구?” “비브라늄, 너희 무기.” “우리 무기는 전쟁용이 아니야. 동족이 아닌 사람을 심판하고 처단하는 것 또한 우리 방식이 아니고. 난 인류가 아닌 와칸다의 왕이다. 동족을 안전하게 지키고 너 같은 놈에게서 비브라늄을 지키는 게 나의 의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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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만은 생전 인터뷰에서 “와칸다는 물론 만천하에 존재를 드러내는 지도자에게 어떤 책임감이 요구되는지를 두고 깊게 고민했다”고 했다. “이 영화와 내가 어떤 문화적 영향력을 갖게 될지를 생각하니 막중한 책임감이 생겼다. 흑인으로서 역사와 전통을 발견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보스만의 정체성 회복은 백인과 분리된 흑인의 그것이었다.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의 풍부한 문화와 가치에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작이 된 ‘마 레이니의 검은 엉덩이’에 출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원작자 어거스트 윌슨(1945~2005)은 흑인 블루스 가수 마 레이니(1886~1939)를 통해 블루스가 어떻게 백인에게 상품화됐는지 보여준다. 미국 흑인이 직면한 역사적 사실과 경험을 토대로 흑인의 역사·문화 계승의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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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만이 연기한 레비는 블루스를 춤에 적당한 재즈 스타일로 쉽게 바꿔버린다. 백인처럼 블루스를 유행이 끝난 음악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블루스가 쉽게 잊힌 건 그와 같은 세대들이 거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백인 문화에 편승하려던 흑인 중산층이 기피했다. 권력 관계를 주시하고 그것에 옮겨 다니다가 상실의 시대를 맞고 말았다.


윌슨은 ‘마 레이니의 검은 엉덩이’, ‘울타리’ 등 다양한 작품에서 미국 흑인의 뿌리가 아프리카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아프리카 문화와 전통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보스만은 그 소중한 가치를 다시 일깨운 장본인이다. 거인의 발자취는 짧은 외침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와칸다 포에버!”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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