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에세이 오늘] 산송(山訟) 400년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조선왕조실록 영조 41년(1765)의 기록.


윤 2월23일, 임금이 밤에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심정최와 윤희복을 친문(親問)한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가문의 산송(山訟·묘지 소송) 때문이었다. 두 문중의 산송은 16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주에 고려 시중을 지낸 윤관의 묘가 있었는데 실전(失傳)됐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그해 아버지의 묘를 윤관의 묘역 바로 위에 조성했다. 1658년에는 조정에서 이 일대 땅을 하사받아 문중 묘역으로 삼았다. 심지원도 1662년 이곳에 묻혔다. 그의 묘는 윤관의 묘에 압장(壓葬)한 모양이었다. 압장이란 분묘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후손을 매장하는 형태로 조선 시대에는 금기였다.

심지원이 죽고 100년이 지났다. 1763년 윤씨 문중에서 윤관의 묘를 찾다가 심지원 묘 앞에 조성된 계체(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놓은 장대석)를 허물었다. 심씨 문중은 격분해 고양군수에게 심지원의 묘를 훼손한 윤씨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명문가의 분쟁을 감당하기 어려운 고양군수가 문제를 중앙정부에 넘겨 영조까지 나서게 된 것이었다. 임금이 윤관과 심지원의 묘를 그대로 받들라 했으나 윤씨 문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영조는 마침내 "엄하게 처치하지 않으면 기강을 무너지게 하고 풍화(風化)를 위태롭게 하는 일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며 일흔한 살 노구를 이끌고 친문에 나섰다.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밤을 새워 친문한 다음 심정최와 윤희복에게 모두 벌을 내리고 귀양까지 보냈다. 일흔 넘은 노인이던 윤희복은 귀양 가는 도중에 죽었다. 양가의 산송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는 조선의 권문세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대 인물 종합정보'에 따르면 파평 윤씨 문중에서 문과 급제자 346명, 무과 급제자 317명이 나왔다. 왕비를 가장 많이(4명) 낸 가문이기도 하다. 청송 심씨는 문과 급제자 198명, 무과 급제자 131명을 냈다. 왕비는 셋이 나왔고, 정승 열세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영의정이었다. 명문가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니 어느 쪽도 물러서기 어려웠다.

두 문중은 2005년에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 해 8월4일 심지원의 묘를 비롯한 청송 심씨 종중 묘 열아홉 기와 신도비 등을 파평 윤씨 문중이 제공하는 2500여평으로 이장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두 문중의 대종회는 2006년 4월10일 이 같은 합의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해묵은 산송에 종지부를 찍었다. 심지원이 윤관의 묘에 아버지를 안장한 지 392년, 영조가 친문한 지 241년 뒤의 일이었다. 양 문중은 합의서에 "조상을 바로 섬기려는 신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세상에는 자칫 곡해될 우려가 있어 대승적인 결정으로 400년간의 갈등을 해소하기로 한다"고 적었다. 그 뒤에는 "두 종중은 서로 존중하고 서로 선대 분묘도 공경하며 영구적으로 관리하도록 협조한다"고 명시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 때나 묏자리를 잡을 때 풍수지리를 살폈다. 특히 조상의 묏자리를 잘 쓰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믿는 '음택 풍수'를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윤씨와 심씨 가문의 분쟁은 길지를 다투는 탐욕의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 오직 가문의 명예와 조상의 안녕을 구한 정성의 발로였으리라. 그랬기에 명예로이 분쟁을 끝내 새로운 역사를 기입할 수 있었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포토] 외국인환대행사, 행운을 잡아라 영풍 장녀, 13억에 영풍문고 개인 최대주주 됐다 "1500명? 2000명?"…의대 증원 수험생 유불리에도 영향

    #국내이슈

  • "화웨이, 하버드 등 美대학 연구자금 비밀리 지원" 이재용, 바티칸서 교황 만났다…'삼성 전광판' 답례 차원인 듯 피벗 지연예고에도 "금리 인상 없을 것"…예상보다 '비둘기' 파월(종합)

    #해외이슈

  • [포토] '공중 곡예' [포토] 우아한 '날갯짓' [포토] 연휴 앞두고 '해외로!'

    #포토PICK

  • 현대차 수소전기트럭, 美 달린다…5대 추가 수주 현대차, 美 하이브리드 月 판매 1만대 돌파 고유가시대엔 하이브리드…르노 '아르카나' 인기

    #CAR라이프

  • 국내 첫 임신 동성부부, 딸 출산 "사랑하면 가족…혈연은 중요치 않아" [뉴스속 용어]'네오탐'이 장 건강 해친다?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